메타능력1. 공공선(Common Good) -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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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능력1. 공공선(Common Good)
- 메타능력이란?
WHY?
- 미래기술의 궁극적인 목표
- 진로를 선택하는 기준으로서 ‘공공선’
■ 메타능력이란?
지금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종합하면, 미래의 아이들
'메타키즈'에게 필요한 능력은 ‘21세기에 필요한 기술’을
바탕으로 하되 미래에 맞는 개념을 재정립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래사회의 특성과 우리나라 교육계의 특성을 반영
하여 우리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반영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시간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수많은 젊은
세대를 경험하며 그들에게 부족하거나 꼭 필요한 능력을
도출하고 전문가들의 연구를 참조하여 STEM능력과 철학적
사고를 융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왜?’ 실제적으로 메타키즈들에게 이 능력이 필요한지
‘무엇을?’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일상 생활에서 해야
하는지
이것이 이글의 핵심이고 동시대 아이들 키우는 부모로서
같이 공유하고 실천하며 아이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열어줄
수 있다면 보탬이 되고 싶은 것이 작은 바램이다
■ 공공선(Common Good)
말 그대로 ‘공공선은 모두를 위해 좋은 것’ 이다. 그렇다면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내가 불행해져야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반대로
‘나에게는 좋고 타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 악행’은
나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언젠가 등산을 갔는데 아들이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서 보여
주며 몇 개는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들의
손바닥에 있는 도토리 중에 구멍이 있고 모양이 예쁘지 않은
도토리를 보고 버리자고 했다.
“아빠는 얼마전에 어렵거나 힘든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같이
놀아야 한다고 말 했으면서 왜 아픈 도토리는 버리라 그래?
얘는 누구랑 놀라고!”
아들의 이야기에 머리를 무엇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당시 대학에서 철학과 윤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론과 현실을 유리(流離)시키는 것은 오히려 어른인
나였던 것이다.
미래의 공공선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기에
나의 이익을 위해 악행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래의 공공선은 행위에 대한 의지가 선했는지를 우선적
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의지의 선(善)’ 평가기준은
‘공공(공동)에게, 나아가 인류애적 사고를 우선 했는가’
이다.
너무 거창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메타키즈들이 하는 모든
언행은 지금도 미래에도 범세계적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세계의 셀럽, 아니면 방글라데시[22]
시골의 누군가가 네트워크에 공유한 한마디는 확장범위만
다를 뿐, 이미 클릭 한 번으로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메타키즈들은 말과 행동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상상의 나래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
이면서도 공익을 위한 행동과 누구에게도 납득이 되는
합리적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공공선은 미래의 기술과 사회의 운영의 척도가 될 것이기
때문에 평소부터 머리와 몸에 익혀야 결정적이 순간에
공감과 명분을 얻고, 사회의 신랄한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마치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옳다고 배운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동, 아픈 도토리가 외롭지 않도록 다른 건강한
도토리와 함께 챙겨가야 한다는 선한 마음과 실천이
공공선이다.
WHY?
- 미래기술의 궁극적인 목표
- 진로를 선택하는 기준으로서 ‘공공선’
■ 미래기술의 궁극적인 목표
화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노벨화학상(2024)을 수상한
구글의 인공지능 계열사인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는 인간 수준의 인지능력을
갖춘 ‘범용인공지능(AGI)이 10년 이내에 등장할 것'으로
내다보며 “인간은 AGI로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기후
(위기)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받고,
생산성의 향상과 일상생활의 풍요로움, 일상적인 관리
업무 자동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고 했다.[23]
등장당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놀라게 하는 『Chat GPT』를
개발, 보급한 오픈 AI의 공동 설립자이자 수석과학자인
‘일리야 수츠케베르’와 ‘얀 레이케’ 얼라인먼트 총괄은 자사
블로그를 통해 “초지능은 인류가 발명한 기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기술이 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인류를 무력화
하고 멸종시켜 버릴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로서는 초지능 인공지능(AI)을 제어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솔루션은 없다”고
지적했고, 인간 안전 확보 위한 연구 나설 필요가 있다고
했다.[24]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미래는 빠르게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10년 안에 인공지능(AI)은 초지능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며, 인간을 대체하여 의료, 교육, 금융, 제조, 에너지,
교통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어낼 것으로 예상
된다.
하지만 미래 기술 발전은 인류에게 기회와 함께 책임감을
요구한다. 인공지능 기술이 윤리적으로 개발 및 사용될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인공지능 기술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기술의 발전에 비교하여 인공지능 윤리
등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성
설정이 미흡하다. 이는 자칫 인류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제도적, 윤리적 기준을 제시
하고, 인공지능에게는 발전의 방향성을 설정해야 한다.
그 설정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공공선’ 이다.
기술을 개발하는 개발자, 발전하는 기술을 사용하는 개인과
조직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도 공공선이다.
미래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이 서로 연결
되어 살아가는 사회에 신뢰와 상생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희망이 된다.
개인에게는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물질 만능주의, 기술 만능주의에 함몰되어 개인의 자아가
비인간화 되는 것을 이겨내고 인류애를 중심으로 삶의
목적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 진로를 선택하는 기준으로서 ‘공공선’
메타키즈들이 진로를 선택할 때는 부모세대와는 많은
것이 다를 것이다. 없었던 직업이 생겨나고 있었던
직업이 사라질 것이다.
작금의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미래에 없을 수도 있고,
기술적응에 대한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 있다.
현재에도 불과 십년전과 선호하는 직업의 양상도 변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유명 유튜버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부모들은 아이에게 (일부 극단적인 경우) 인류애에
기초해야 하는 직업관을 상실 하고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의료분쟁의 중심에 있는 의사,
선과 악의 진실보다 수임료에 따라 죄질이 결정되는
법조계의 변호사가 되길 바란다.
정말로 특이 케이스로 우리나라는 ‘사’ 자 전문직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아니 부모세대들은 아직도 그렇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진로를 선택하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떳떳한 가?’ 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자식들에 대한
나의 진로 강요는 그렇게도 나를 괴롭게 하던 부모님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인류애의 실천을 위해’,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의사와 변호사가 되라’ 하고 내가 내 자식에게 장래를
강요할 때 대의를 내세우는가? 아니면
소득이 높기 때문에,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진로선택의 기준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 의사와 변호사 업무도 미래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빅데이터, 인공지능, 초정밀 로봇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눈앞의 현실에, 아니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우리는 ‘현재’에 불안해하고 있다.
10년 이내, 아이들은 부모세대의 기준으로는(생각도 못한)
완전히 다른 진로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고 스스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때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기여하기 위한’ 이라는 숭고한
대의(大義)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불변의 선택 기준이며,
미래에도 이론과 실제의 유리로부터 나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사’자 추구는 공공선이 진로 선택의
목적이 되지 않으면 결국 유능한 인재들을 쓸데없는 경쟁에
몰아넣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물질만능주의와
첨단 기술의 부정교합은 사이버 도박, 암호화 화폐, 스캠
(scam) 같은 사회적 병폐를 유발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메타키즈는 세상의 발전에 적응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부모님과 우리 세대는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메타키즈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아이를 낳기 싫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당당하게 아이들에게 ‘미래’를
살 방법을 강요할 권리가 있을까?
나의 성장환경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아이 낳기 싫고,
반대로
‘나는 괴로웠어도 이겨내고 이만큼 사니까 너희도
고생하면 나만큼 살 수 있다.’
라고 아이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나는 대충 포기했지만 너는 해내야 해’
라며 나도 못한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맞을까?
모든 것은 결과가 증명하겠지만 과정을 무시한 결과를
우리는 현실로 직시하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안 낳는다는 것은 그만큼 남들 하는 것들을
나의 아이에게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맞벌이 부부는 아이와 함께할 시간도 적고,
시키고 싶은 것도 다 시킬 수 없기 때문에 여건 내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진이 빠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다.
부모들은 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가?
이 질문의 의도는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육아 시간이 없다면 사교육을
시키기 전에 먼저, 부모는 남들을 따라서 학원을 보내는
것과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내는 학원을 보냈는데
투정을 부린다고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맞는
학원을 찾아줘야 한다.
거기에는 부모의 앞을 내다보는 시각도 포함된다.
메타키즈에게 학원은 당장 내일 필요 없어질 기술과 공식을
잘 외우게 하기 위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것’의
감각을 알고 즐기면서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고력과
타인과의 관계를 깨닫는 사회성을 찾는 기회이다.
그런 영역의 확보와 사회성을 키우면서 아이들은 관계의
신뢰성을 위해 법과 규칙,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는 것을
알고 나와 조직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 공공선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22] 방글라데시 시골마을을 이유로 든 것은 방글라데시
시골의 학생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구독자가
신청하면 생일 축하를 해주는 영상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Youtube, team Azimkiya)
[23] 세계일보(2024.10.04); 알파고 아버지 “AI, 10년 내
모든 병 치료
[24] 동아일보(2023.07.07); 오픈AI “인간보다 뛰어난
초지능 AI 10년내 등장… 인류 위협할 것”
동아일보 (donga.com)
* 참고: 일리야 수츠베르는 2024년 회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