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연 Dec 17. 2021

'보고 싶다'의 진짜 의미

엄마. 보고 싶어.

11월에 태어난 나는 또래들보다 모든 것이 느렸다.

성장, 발달, 언어, 학습 등뿐만 아니라 변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통제하는 것도 그랬다. 내가 새 학년에 적응할만하면 겨울방학이 찾아오고 이내 학년이 바뀌었다. 담임 선생님이 바뀌고, 반 친구들이 바뀌고, 반 번호 숫자가 바뀌는 그 모든 과정은 내게 새로운 과제처럼 주어졌다. 그 낯선 번호와 얼굴들에 겨우 익숙해질 만하면 또 학년이 바뀌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향적이었던 나는 그때부터 '헤어짐, 이별' 같은 상황에 대한 내 감정들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집에 친구들이나 사촌들이 잠시 놀러 왔다가 돌아갈 때면 갑자기 너무 큰 공허함과 외로움이 느껴져 엉엉 울곤 했다. 그 감정의 불씨는 점점 더 커져 실제로 몸에서 열이 나고 근육통이 찾아와 엄마의 등에 업혀 끙끙 앓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을수록 이별을 먼저 두려워하게 되었다. 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따르니까.


그렇게 이별 앞에 나약한 내가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이별의 아픔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13살 때의 기억이다. 그때는 12월이었다. 엄마는 "언젠가 너희가 다 크면 너희 아빠랑 이혼하고 엄마의 삶을 살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을 현실화시켰다. 나는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엄마의 눈에는 다 큰 자식이었을까. 엄마 앞 길 막지 마.라고 여러 차례 예고도 했던 일이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돌리던 엄마와의 이별이 눈앞에 성큼 다가오니 막막했다. 엄마는 나를 아빠에게 두고 나가면서 말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엄마 사진 봐,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엄마 만날 수도 있어."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진 속 엄마는 나와 대화를 나눌 수도, 나를 안아줄 수도, 내가 체했을 때 등을 두드려 줄 수도 없는데....' 


"엄마. 보고 싶어."


허공에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그 말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저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일은 아빠의 온갖 구박과 방임에서 날 구해줄 수 없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지 'Look' 이 아닐 것이다. 보고 싶다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 일상을 함께 하고 싶어요.'


'With'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남편과 결혼해서 타지로 와 생활한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항상 누군가가 나를 떠나는 인생이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나의 고향과 지인들과 사랑하는 것들을 놓고 떠나왔다. 사실 아직도 이곳이 적응이 안 되고 전에 있던 곳이 그리워 자주 찾아가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오곤 한다. 내가 놓고 온 많은 것들이 그립고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찾아가는 것도 썩 즐겁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길이 항상 서글프기 때문이다.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이제는 그들의 일상 가운데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할 뿐이다. 130km를 달려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는 그들과 일상을 함께할 수 없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다. 단발성 만남에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가끔 얼굴 볼 수 있는 걸 감사해야 한다. 대신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이곳을 스스로 택해 왔기에 이제는 내 일상을 나누고 함께하는 존재는 남편임을 기억하고 마음을 이곳에 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고 싶다. 

이 말 한마디 안에는 내 인생 속 한 페이지라도 나와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이 들어 있으며, 내가 놓치며 살아온 많은 것들에 대한 향수도 함께 들어있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이 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