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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Mar 10. 2024

우리가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예이츠의 「위안받는 어리석음」

   1898년. 큐피드의 황금화살을 맞은 후 거의 8년 간 쫓아다녔던 모드 곤이 그녀보다 16살이나 많은 유부남의 정부였으며 게다가 이미 두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예이츠.  이제 화살이 관통한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한 손으로 흐르는 피를 막고 한 손으로 시를 씁니다. 1899년에 발표한「그는 천상의 천을 소망한다」(“He wishes for the Clothes of Heaven”)입니다.      



내가 금빛과 은빛으로 짠  

천상의 천을 가졌더라면

어두운 빛과 밝은 빛 그리고 어스름한 빛의

푸르고 희미하고 검은색 천을 가졌더라면

난 그 천을 당신의 발아래 펼치리라

그러나 가난한 난 가진 건 꿈뿐

당신의 발아래 나의 꿈을 펼치노니  

그대 사뿐히 밟으소서. 내 꿈을 밟는 것이니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 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이 시의 모티브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당시 명망 높은 정치가이자 탐험가였던 월터 레일리 경 사이에 있었던 망토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행원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던 중 진흙탕을 만납니다. 그 진흙탕이 그리 깊거나 크지 않은 사소한 장애물이었지만 여왕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여왕 옆에 있었던 신하 월터 레일리가 주저 없이 자신의 벨벳 망토를 벗어 진흙탕 위에 깔았습니다. 레일리 경은 여왕님의 고귀한 발에 진흙이 묻지 않도록 자신의 값비싼 망토를 내 던졌고 여왕은 신하의 이러한 행동에 감동합니다. 이 망토 사건은 일어난 지 80년 후에 토마스 풀러가 쓴『귀중한 영국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되는데 사실 그 진위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이츠는 충성스러운 신하 월터 레일리 경이며 자신의 영원한 뮤즈 모드 곤은 엘리자베스 여왕입니다. (사실 시인은 「방울 모자」에서 모드 곤을 젊은 여왕이라고 표현했었죠.) 어느 날 여왕과 신하 앞에 진흙탕이 나타나듯이 예이츠 앞에 그가 꿈꾸는 모드 곤과 함께하는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여인의 과거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시인에게 미스 곤의 과거는 길 위에 생긴 흙탕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이츠는 영국의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시인입니다. (젊은 시절 예이츠는 성공한 시인이었지만 늘 궁핍한 삶을 살았으며 그레고리 여사의 재정적 후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가진 건 꿈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녀의 발아래 펼칠 수 있는 건 레일리 경의 값비싼 벨벳 망토가 아닌 자신의 상상력을 천 삼아 만든 꿈의 망토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간청합니다. 조심스럽게 밟으라고. 왜냐하면 그대는 “나의 꿈을 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꿈은 시인의 무지개 빛 상상력이며 연약하고 부드러운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간청했건만 모드 곤은 예이츠가 펼쳐 놓은 꿈을 다시 한번 외면합니다.  

   

   그럼에도 예이츠는 포기하지 않았고 1900년, 1901년 계속해서 청혼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이미 닫힌 모드 곤의 마음은 열리지 않습니다. 1902년. 24세에 시작한 모드 곤을 향한 사랑. 어느덧 13년의 세월이 흘렀고 예이츠는 이제 37살의 중견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인이자 극작가로서의 예이츠의 명성은 이제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은 존 밀링턴 싱, 아서 시몬즈, 조지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등 그 시대를 빛낸 당대 최고의 문인들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아일랜드 국립극단 설립자 겸 회장 역으로 내정이 되어 있던 예이츠는 어느 날 연극에 관한 즉석 강연을 요청받습니다. 강연을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던 중 그는 전보 한 통을 받습니다. 전보를 본 후 예이츠는 도저히 강연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하얘집니다. 강연을 마쳤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을 못 합니다. 강연 내내 전보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모드 곤으로부터 온 전보였고 그녀가 1903년 2 월 파리에서 존 맥브라이드 대위와 결혼을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34세의 맥브라이드는 아일랜드 형제단의 회원으로 민족주의자 존 오리어리의 추종자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과격한 혁명 파였고 그의 이름은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지지하는 아일랜드인 들의 구심점이었습니다.  모드 곤과 맥브라이드 대위의 유일한 연결점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대의가 전부였고 둘의 동료애는 결혼의 촉매제가 됩니다. 그러나 둘의 결혼생활은 불과 일 년 만에 파경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2 년 후 1904년 예이츠는 소넷 형식의 작은 시「위안받는 어리석음」(“The Folly of Being Comforted”)을 발표합니다.  



언제나 친절한 분이 어제 말했다

그대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에 하얀 실타래가 생기고

그녀의 눈 주위에 작은 그림자가 생겼네요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현명해지기 쉬우니, 그러니

그대에 필요한 건 오직 인내뿐입니다.

                                  가슴이 외칩니다. 아니요.   


내겐 곡식 한 톨의,  빵 부스러기 한 조각만큼의 위안도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질 뿐

그녀가 가진 그 위대한 고귀함 때문에

그녀 주위에서 이글거리는 불은 그녀가 움직이면   

더 분명하게 타오르니. 그녀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격정적인 여름이 그녀의 눈에 들어 있었을 때는

오 가슴이여 가슴이여 너는 알리라

그녀가 머리만 돌려도 위로받는 어리석음을


One that is ever kind said yesterday:

‘Your well-belovèd’s hair has threads of grey,

And little shadows come about her eyes;

Time can but make it easier to be wise

Though now it seems impossible, and so

All that you need is patience.’


                                                   Heart cries, ‘No,

I have not a crumb of comfort, not a grain.

Time can but make her beauty over again:

Because of that great nobleness of hers

The fire that stirs about her, when she stirs,

Burns but more clearly. O she had not these ways

When all the wild summer was in her gaze.’


O heart! O heart! if she’d but turn her head,

You’d know the folly of being comforted.



언제나 친절한 분은 1896년 예이츠 인생에 등장한 이래 시인의 재정적인 후원자이자 충실한 친구 역할을 한 그레고리 여사입니다.  그레고리 여사는 젊은 시인의 실연에 안타까워하며 시인을 위로하려 노력합니다.  모드 곤 나이 벌써 36세. “머리에 흰머리도 생기고 눈 주위도 그림자가 지는 나이잖아요. 시간이 다 해결해 주니 필요한 건 인내예요.” 우리가 상심한 친구에게 흔히 해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말에 쌀 눈만큼의 위안도 받지 못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그녀에게 비록 20대의 한 여름 같은 정열은 찾아볼 수 없지요. 그렇지만 30 중반을 넘긴 그녀의 미는 이제 다른 차원입니다. 그녀가 지닌 위대한 고귀함은 그녀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지게 만들고 있어요.”  여기서 예이츠가 언급한 불의 이미지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표현( “그녀는 횃불을 밝게 타도록 가르치네”  “She teaches the torches to burn bright” )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 같은 줄리엣의 미가 횃불을 압도하듯이 모드 곤은 불로 하여금 긴장하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날 이기려면 넌 더 밝게 타올라야 할 거라고.” 예이츠에게 진정한 위로는 친절한 친구가 말하는 “시간” “인내” 가 아니고 “그녀가 고개만 돌린다면” “나에게 눈길 한 번만 준다면”입니다. 당신은 그걸 “어리석은 위로”라고 부르겠지만 말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질문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실연한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주는 위로의 말이 진정으로 위로가 될까?” 시인의 반응은 부정적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대부분 내 기준에서 내 경험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의 입장이 아니며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을 100%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 다르듯 모든 사람마다 각각의 고유 주파수가 다 다르니 실연의 감정 주파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의 주파수에 맞추지 못한 상태에서 건네는 위로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잡음이나 초점 잃은 영상에 불과합니다. 언어로 피아노와 피아니시시모 때로는 피아니시시시모에 해당하는 감정까지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시인의 섬세한 마음에 생긴 상처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두 사람뿐입니다. 그가 사랑한 여인 모드 곤 아니면 시인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간 후 시인은 창작에 더욱 몰두합니다. 이젠 시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한  모드 곤의 영혼과 이별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맘을 열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를 썼던 예이츠. 이젠 그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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