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처돌이 Sep 27. 2021

유지어트는 쉬울 줄 알았는데:
인연이 아닌가 보다 했지

36kg를 감량한 탄수화물 중독자의 유지어트 이야기








첫 인상의 강렬함은 이미 수 많은 매체에서의 검증과 실험으로 그 중요성이 입증되었지만 놀랍게도 살다보면 종종 바뀌기 마련이다. 영 마음이 가지 않던 사람의 뜻밖의 일면을 발견하고 누그러진다던가, 반대로 싹싹한줄 알았던 사람의 냉정한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비단 사람 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옷에서도 종종 일어나니 이제는 첫 인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환상과 강력함에서 깨어날 때도 되었다. 


일평생을 비만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랑은 연이 아니다 싶었던게 몇 가지 있다. 55같은 66사이즈의 옷이 가득한 백화점 쇼핑이라던가, 운동을 위한 옷이면서도 마른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레깅스, 공중 목욕탕이나 수영장... ...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역시 가장 연이 없겠지 했던 말은 꾸준한 운동이다. '꾸준하게' '운동을 하는' 삶을 나는 여태껏 상상해보지 못했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평범한 사람들은 주 2-3회 운동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왔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운동이라는 단어와 담을 쌓다시피 살아온 사람이다. 다이어트를 하며 간신히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빈말로도 잘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꽝인데다 아무리 필라테스를 해도 유연성은 하나도 안 늘었다. 그래도 꾸준히는 하고 있다. 꾸준함의 힘은 이미 내가 수십 킬로그램을 감량하며 그 중요성을 몸으로 체험했으니 잘 알고 있지만, 가시적인 운동 성과는 거의 없었다. 


최근 달리기에 부쩍 재미를 붙인 나는 런데이라는 어플과 함께 하루 30분 달리기를 꾸준히 하고 있었다. 런데이의 장점은 달리는 중간 시간과 거리를 체크해주고, 적당한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멘트와 함께 초보 런너에게 여러 조언을 건네준다. 뛰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으니 나같은 초짜도 꽤 할 만 했다. 무엇보다 세세하게 나눠진  트레이닝의 난이도가 적당해서 부담없이 운동할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초반에는 1분 뛰고 2분 쉬는 아주 널럴한 난이도에서 점차 뛰는 시간은 늘어나고 쉬는 시간은 줄어든다. 쉬지 않고 30분을 뛰는게 런데이의 최종 목표이다보니 프로그램이 총 24개로 나뉘어 있다. 덕분에 조깅화도 사고 러닝용 겉옷도 한 벌 장만했다. 운동은 템빨(?)이라는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긴 결과다. 어쩐지 어플 뒷광고 같은 글이 되었는데 이 글은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기는... ... 커녕 내가 직접 깔고 느낀 내돈내산 후기임을 밝힌다.    


달리기를 하다보니 관련 행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코로나 시국이다보니 마라톤 같이 인파가 많이 몰리는 행사는 역시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마라톤에 참가한다니? 이게 내 인생에 정말 가당키나 한 말인지 웃기기도 했다. 전문적인 러너들이나 수준이 높은 취미인들이 참여하는 행사라고만 생각했고, 말 그대로 나하고는 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달리기용 양말을 사려고 검색하던 중 관련 검색어로 함께 뜬 어떤 마라톤 행사의 이름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상에, 빵빵런이라니. 브런치 닉네임부터 빵처돌이인 내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슬로건도 마음에 쏙 들었다. 살 찌는 건 싫지만, 빵은 먹고 싶어! 내 인생의 모토같은 문구나 다름 없다. 강한 운명을 느낀 나는 마라톤 행사의 조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프라인에서 모여 뛰는 행사는 한강 노들섬이지만 온라인으로 신청하여 물품들을 택배로 받은 후 집 근처에서 뛰는 온라인 마라톤도 지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청하면 받는 물품들이 죄다 빵이나 달다구리 같은 간식이었다. 빵에 대한 진심을 느낄 수 있는 라인업에 나는 친구를 꼬셔 가장 짧은 거리인 5km 마라톤을 덜컥 신청해 버렸다. 도착한 물품들은 행사용 티셔츠와 완주 메달, 각종 간식거리들이었다. 달리기 대회가 제공하는 것 치고는 꽤 본격적인 달다구리들이 많아서 행복했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에 후회도 좀 했지만 2달이나 남았으니 그 전까지 달리기 실력을 늘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낙관적인 생각도 있었다. 다이어트가 내게 준 여러 장점 중 하나는 일단 해보자, 아니면 말고 같은 도전 정신이다. 어차피 온라인 마라톤이니 완주 후 기록만 SNS에 올려도 되니 부담도 적었다. 일단 달리기부터 꾸준히 연습해보자 싶어서 런데이가 제공하는 8주짜리 달리기 도전 트레이닝을 열심히 달성했다. 달성할때마다 앱에 도장이 찍히는게 별 것 아닌듯 해도 쏠쏠하니 기분이 좋았다. 날이 갈수록 달리기는 점점 어려워졌지만 또 뛰다보니 오기가 생겨서 이를 악물고 뛰었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운동량일지는 몰라도 꾸준히 달리기를 해본 적 없는 나에게는 꽤 고무적인 결과였다. 그렇게 점점 빵빵런 날짜는 다가오고 아등바등 퇴근 후에 울상으로 나서기를 몇주간 반복한 끝에... ...





마침내 목표한 훈련을 모두 달성했다! 야호! 중간에 코로나 단계가 격상되며 행사가 미뤄진 덕분이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 목표한 훈련량을 달성하고 마라톤 당일까지 나름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 애썼다. 백신을 맞은 후로 기운이 없고 소화 불량이 곧잘 일어난 터라 일부러 속 편한 스프와 식빵 한 조각을 적셔먹고 나섰다.  5KM를 뛰어야 하니 편도 2.5KM을 뛰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승리와 성공을 만끽하며 공차 초당옥수수맛 버블티를 사먹겠다는 좀 비겁한 꿍꿍잇속도 슬쩍 숨겨놓았다.   


마침 또 해가 얼마나 좋은지 걷기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아지는 날이었다. 그러나 회사원이라 낮에 뛴 경험이 없는 나는 날씨를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밤에만 달리다보니 더위나 갈증이 크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낮에 달리다보니 햇볕은 물론 마스크를 끼고 뛰는게 두배는 더 고역이었다. 평소 런데이 30분이면 4.5KM 정도를 뛰니 5KM야 거뜬하리라는 계산이었는데, 런데이에는 휴식 시간이 포함되어있음을 간과한 나는 달리는 내내 절대 쉬지 않겠다는 커다란 야망을 품었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지만 엄청나게 느린 페이스로 달렸으니 그야말로 굼벵이 달리는 속도였지만 어차피 나 좋자고 하는 달리기고 마라톤이다.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날씨가 워낙 좋아서 가족 단위로 손을 잡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외출을 즐기는 사람들을 뚫고 혼자 헉헉대며 뛰고 있으려니 좀 웃기다 싶었지만 나중에 가니 웃을 힘도 안 났다. 


런데이로 뛸때는 할 만 하더니 3KM가 넘어가자 숨이 꼴딱 넘어갔다. 백신을 맞고 회복이 안 되는 컨디션으로 너무 무리를 했나 싶었으나 그러기엔 연휴 내내 푹 쉬고 잘 먹긴 했다. 이 마라톤은 내돈내산이므로 무조건 완주해야한다는 가성비의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다. 거의 걷는 것과 다름 없는 속도긴 하였으나 어쨌든 쉬지 않고 뛰었다. 혼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포기할까를 백번쯤 반복하자 마침내 500M가 남았다는 거리 표시가 떴다. 그 후로는 기억이 잘 안난다. 그냥 뛰고 뛰다보니 드디어 완주했고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 인생 첫 마라톤 기록이니 여기에도 슬쩍 올려본다. 다 달리고 나니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 몸이 땀에 절어서 도저히 봐줄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필라테스와는 다른 뻐근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감각에 편의점에서 500ML 생수를 따자마자 원샷했다. 물이 말 그대로 생명수 같았다. 이렇게까지 땀 투성이가 된 적도 오랫만이구나 싶었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느낌이 너무 짜증나서 샤워가 간절했다. 집에 가는 길은 또 왜 이렇게 먼지. 다리를 후들대며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대체 왜 나는 이걸 3만원이나 내고 신청해서 사서 고생을 했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역시 충동이란건 무섭다. 


'내가 다시는 마라톤 신청하나봐라.'


인연이 아닌건 다 이유가 있었나보다, 하고 혀를 내둘렀지만 막상 또 글을 쓰다보니 다음번엔 10KM를 도전해볼까 하는 무모한 욕심도 솟는다. 불과 몇 년전의 나라면 내가 마라톤 대회를 돈 주고 직접 참여해 뛸 거라는 미래를 상상이나 했을까? 미래는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 나가기 싫고 운동하기 싫은 하루하루가 쌓여야만 내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도 새삼 깨달았다. 계속 뛰어봐야겠다. 어디까지 뛸 수 있는지도 결국은 내가 결정하는 일이다. 매일이 쌓이면 거대한 흐름이 된다는 것을 다이어트를 하며 절실히 체감한다. 포기하지 않는 일의 기분 좋음도, 눈으로 보이는 달성감의 소중함도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쾌감이다. 뭐든 즐길만한 운동의 가짓수를 늘려놓으면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싶기도 하다. 나는 계속해서 유지어트를 해야하는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선택지가 많을수록 좋기도 하겠지. 음, 역시 마라톤 하길 잘 했어.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어서 신기하다. 역시 세상만사 겪어봐야 아는 일도 있다.  


그건 그렇고 마라톤 끝나고 먹기로 다짐한 초당옥수수 공차는 가게 휴일이라서 결국 못 마셨다. 이럴수가! 




작가의 이전글 유지어트는 쉬울 줄 알았는데: 야채에도 때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