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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Aug 23. 2022

빗속의 모닥불

#모닥불 #인생 #삶#장맛비


이른 저녁부터 다시 시작된 비가 점점 세차게 내린다.

작은 파라솔 밑에서 모닥불을 피우느라 한 손으론 우산을 잡고 한 손으론 부채질을 열심히 한다.

젖은 장작은 몸의 습기를 흰 연기로 내뿜으며 파라솔 안을 맴돌아 

몸을 웅크린 나를 훈연시킨 다음 검은 하늘로 사라진다.

나는 눈물을 훔치다 견디지 못하면 남편과 자리를 바꾼다.

남편 역시도 자신의 눈이 버틸 만큼 부채질을 하다 한계에 다다르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뒤로 물러난다.


비는 쏟아졌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밤새 계속된다.

그 비에 등을 적셔가며 남편은 부지런히 젖은 장작을 불위에 올려놓고 말려가며 

한 통 가득한 나무를 다 태운다.

그 모습은 꼭 복잡한 머릿속의 무언가를 하나하나 꺼내어 불속에 던져 넣고 태우는 

깊고 신중한 작업인 듯하다.

젖은 탓에 활활 타오르지 않는 모닥불.

이리저리 장작을 굴리며 말린 다음에 불이 잘 붙도록 자리를 돌봐 옮겨 놓는 남편.

그의 표정과 동작이 너무도 철학적으로 진중해 보이기까지 한 것은 내 지나친 생각일까.

펜션 옆방의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를 참 이상하다 생각할 듯싶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속에 모닥불이라니.


딸들과 휴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선택한 것이 광복절 연휴,

비도 엄청나게 오고, 코로나도 다시 극성을 부려 차일피일 미루다 큰 맘먹고 계획한 가족 휴가 사흘.

떠날 때부터 시작된 비가 저녁에 잠시 멈추었다가 저녁상을 치우자마자 다시 시작된다.

그나마 고기 구워 먹고, 모닥불 피울 준비를 할 때까지는 봐준 것 같다.

거기까지가 딸들과의 모처럼 갖는 휴가의 즐거움은 다였던 듯싶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 버린 딸들을 놔두고 초로의 부부가 모닥불을 피운다.

휴가의 목적이 오직 모닥불 피우기였던 것처럼 모닥불에 집착하는 남편 

그리고 말리지 않고 동참하는 나.

딱히 방으로 들어가서 할 일도 없긴 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과 날리는 비의 포말, 

오래된 나무들이 빽빽한 높은 산의 검은 실루엣,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  

그것만으로도 모든 세상사가 잊어지고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검은 밤 쏟아져 내릴 듯 하늘 가득한 별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온 산골에서

별 대신 쏟아지는 비를 만난 것이 무척이나 속상했지만 

기대하지 않은 빗속의 모닥불 덕에 그 불만이 조금 줄어들긴 했다.


모닥불은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

장작의 습기와 주변의 습기를 말려가며 아주 서서히 조그맣게 타오르며 

가느다란 불꽃을 하늘하늘 피워 올린다.

땅바닥에 떨어져 작게 부서저 튀어 오르는 빗방울 때문에 

여린 불꽃은 부채질로 힘을 더해 주지 않으면 금세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부채질을 하면 활활 힘을 받는 듯 타오르다 부채를 놓으면 잔잔하게 퍼지며 힘을 놓는 불꽃.

손으로 쓰다듬어도 뜨겁지 않을 듯 곱고 부드럽게 타오르는 동글한 불꽃의 모습.

그 불꽃은 여름밤 훨훨 타오르는 젊은 날 축제의 캠프파이어 장작불과는 너무도 다른 불꽃이었다.


자꾸 힘을 놓으며 주저앉는 화염을 살리려 부지런히 부채질을 하는 남편과 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꺼트리지 않으려 열심히 집중했던 빗속 모닥불과의 시간.

그 잔잔한 화무의 모닥불이 젊음을 한참 떠나보내고 

이제는 인생의 귀로에 선 나와 남편의 모습 같아 보인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곱게 사위어 흰 재로 남은 지난밤의 흔적을 마주한다.

타다가 남은 작은 나무토막 하나도 없이 하얗고 고운 재로 남은 모닥불의 자취. 

참 깨끗이도 태웠다.

짧은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 가슴속이 조금 가벼운 것은 그저 기분 탓만은 아닌 듯싶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남편과 나는 별스런 대화도 없이 밤 이슥하도록 무엇을 그리 열심히 태웠던 것일까.

캄캄한 먹구름 너머에는 그 옛날과 다름없이 하늘 가득한 별들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쏟아지듯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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