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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Oct 04. 2023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오래전에는 삶에 아주 거창한 무엇이 있는 줄로 알았다.


또다시 날이 밝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남아 있는 잠을 털어낸다.

지난밤 꿈조각들이 후루루 날아가 버리고 머릿속이 비워진다.

아침 식탁을 준비한다.

호밀빵 한 조각에 버터와 잼... 큰 컵의 커피 한잔.

사과를 하나 꺼내어 깎는다.

늘 똑같이 시작되는 아침을 맞는다.


남은 커피를 들고 잠시 tv뉴스를 본다.

뉴스는 늘 그렇듯 반가운 내용이 별로 없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일어나

며칠 건너뛴 청소를 시작한다.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방마다 돌린 후 걸레질을 한다.

구석구석, 발동이 걸렸을 때

닦아 놓아야 한 이틀은 맘 편할 것 같다.

모처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35번을 틀어본다.

가사노동을 즐겁게 하려고 틀어 놓은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다시 꺼버린다.


몇해 전까지는 음악이 에너지를 솟게 하는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뜨겁던 햇볕이 한풀 꺾여 하늘도 한층 파랗게 물들었다.

보송보송 가을 햇볕을 안은 빨래를 개켜

내복은 내복대로, 수건은 수건대로 장속에 가지런히 넣고

여름 흔적이 남은 옷들을 꺼내어 빨래를 한다.

세탁기를 돌리고 보니 점심. 

잠시 앉아 미뤘던 전화를 한통 돌린다.

친구와 안부 전화를 하면서 점심시간이 훅 뒤로 밀렸다.


예전에는 수다는 시간 낭비라 생각했었다.


혼자 먹는 점심 밥상은 간단하다.

대충 먹은 설거지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 지난 글을 뒤적인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옆에 놓인 에세이집을 집어든다.

지인이 보내온 법정스님의 에세이집 '낡은 옷을 벗어라.'

몇 편을 읽다가 고 잠시 유튜브 서핑을 한다.


전에는 유튜브 서핑도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갑자기 창밖이 어두워지며 먹구름이 몰려든다.

수상한 바깥공기가 비소식을 전한다.

얼른 일어나 방마다 창문 단속을 한다.

우르릉 쾅쾅! 거세게 창문을 두드리며 비가 쏟아진다.

가을이 깊어지려는 비인가? 참 요란하기도 하다.


저녁 시간.

밥을 안치고, 어제 끓여 반 먹은 국을 데우고

추석 지내고 남은 반찬들을 꺼낸다.

새 반찬을 만들지 않는 날은 저녁 준비가 훨씬 수월하다.

다시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닫는다.

오늘의  근무는 끝났다.


전에는 집밖에서 허덕허덕 숨차게 돌아가야만 잘 사는 삶인 줄 알았다.

그래서 집안에서의 삶은 반쪽 삶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시원하게 쓸고 간 거리가 청량하다.

딸과 함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온다.

자기 전 잠시 노트북 앞에 앉는다.

지난 글을 다시 읽고, 새 글을 조금 끄적인다.

피곤함이 살금 다가와 잠자리로 손을 끈다.

오늘 하루가 꿈속으로 이어지고

어제와 같은 하루가 또 문을 닫는다.


예전에는 그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했다.


색다른 삶의 이벤트 없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그것이 감사해야 하는 삶의 모습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 나는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예전엔 삶이 아주 거창한 무엇인 줄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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