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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채 1호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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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 Aug 18. 2021

사라지는 것들을 간직하고 싶어요

조은 님의 지갑 인터뷰 - 1

인터뷰이의 지갑


이 지갑은 제가 중학교 때부터 2017년까지 썼던 거고요. 2018년에 1년 동안 해외 봉사활동 나갈 땐 잠깐 동전 지갑을 썼어요.


지금은 두 지갑 다 갖고 다니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만 있진 않아요. 그냥 잘 못 버리겠어서 다 들고 다녀요. 그리고 친구들이 “뭐야? 너 지갑에 뭐가 이렇게 많아?” 이러면 꺼내서 보여주는 재미도 있고(웃음)



옛날 게 사라진다는 거에 대해서 서운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이게 제일 궁금했어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구권(舊券)을 어떻게 갖고 계신 거예요?


어쩌다 이거를 갖게 됐지? 아마 제가 추측하기론 돼지 저금통에 있다가 그걸 깼는데, 이거 그냥 은행에 맡겨 버리면 이제 구권으로는 다시 못 받잖아요. 저는 구권이 너무 소중한데. 그래서 그냥 지갑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구권이 왜 조은 님한테 소중했어요?


이건 이제 얼마 없으니까. 처음에 구권이 신권으로 바뀌었을 때 저는 ‘아, 저건 너무 장난감 돈 같아. 싫어.’ 이런 느낌이 있었어요.


새로운 변화보다 옛날 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으세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바뀌는 게 싫다고 해서 생각난 건, 어렸을 땐 군복 바뀌는 것도 싫어했어요. 원래 알던 군복이 군복이라는 이미지가 딱 있으니까 그게 바뀌었을 때 ‘저거 너무 양아치 같아.’ 이런 느낌이 좀 있어서. (웃음)


맞아요. 어느 순간 갑자기 모자이크 무늬로 바뀌었던 게 기억이 나요.

약간 공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웃음)


옛날 게 사라진다는 거에 대해서 서운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교과서도 아직 갖고 있고,중학교 명찰도 교복에서 떼어서 가지고 있어요. 저는 세뱃돈 받은 것도 봉투를 못 버렸어요. 봉투엔 들어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그 봉투를 누가 줬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도요.




(놀라며) 혹시 그러면 구권 말고 또 이렇게 옛날 것을 간직하고 계신 게 혹시 있나요?

지금은 사람들한테 없는 거.


제 거는 아니지만 제가 좋아해서 가지고 있는 건데, 아빠가 좀 웃기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옛날에 아빠 대학생 때 학생운동한다고 하면 잡아가고 그런 게 있었는데, 한 번은 경찰이 아빠 학생회실을 턴다는 얘기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학생회실에 있던 당시 불온서적들을 각자 숨겨서 집에 가지고 왔대요. 그런데 그중 몇 권이 아직 집에 있거든요. 그런 거를 간직하고 있어요. 전 그게 저희 집에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옛날에 한번 아빠가 그거를 버리려고 하셨는데 제가 “이걸 왜 버려?!” 해서 새로 이사할 때 들고 오기도 했어요.


그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어… 어떤 생각이 든다기보다는 제가 영향을 좀 받은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아빠가 학생운동하다가 집에 왔는데 등에 경찰한테 밟힌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니면 ‘아빠가 단식 투쟁할 때 엄마가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해서, 엄마를 데리고 나가 떡볶이를 사주면서 보고만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대학생이라면 사회에 참여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들어와서 처음 한 동아리도 그런 종류의 동아리였고.


어떤 거 하셨어요?


‘평화나비’라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동아리인데, 그거를 2년 동안 진짜 열심히 했어요. 어디서 기자회견 하는 게 찍혀서 기사 사진 나간 것도 있고.


평화나비나 해외봉사 같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지 궁금해요.


그런 것들을 할 때 제 가치관이 딱 성립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나는 내 가치관이 이렇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겠다.’라고 해야 됐는데 사실 그 정도까지는 못한 것 같아요. 음… 그런 가치를 내면화하고 싶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있어요.


그런 가치라는 게 어떤 가치일까요?


(생각을 정리하고) 좀 부정적으로 말하면, 저는 저 스스로가 정의로워 보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일을 끝까지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하려면 정말 내 안에서 그 정의라는 가치가 완벽하게 내면화되어 있어야 하는데… 전 그렇지 못해서 좀 지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아빠가 저한테 “평화나비를 왜 하니?”라고 물어보신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 막 횡설수설하면서 “어… 할머님들… 도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그러면 만약 할머님들이 그냥 한일합의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너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이제 그만할 거야?”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래도 계속 할 것 같은데?”라고 하니까 아빠는 “할머님들 도와드리려고 한다며?” 이렇게 얘기하셔서, 제가 그 질문에 대답을 못 했어요. “그러면 이런 활동의 동기가 어떤 게 되어야 하냐”라고 아빠한테 되물었어요.


아빠가 원래 이런 거 먼저 답을 주지 않는 성격인데 제가 너무 답답해하니까 답을 주시더라고요. “네가 어떤 활동을 정말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이유가 너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할머니들을 도와드리려고 하는 거, 그거는 그 가치가 외부에 있기 때문에 네가 오래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너 자신과 너의 주위 사람들이 다 정의로운 세상에 살기를 원해서’ 이런 식으로 동기가 너의 내면에 있어야 오래 할 수 있다."이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근데 제가 느끼기에는 아직 제가 그 단계까지 오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 활동의 동력을 아직 제 안에서는 못 찾았고… 그래서 좀 그렇게 되고 싶고, 더 그런 사람으로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아버님께 되게 많이 배우시겠어요.


그래서 어릴 때는 맨날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랬어요. 현명한 사람의 표상 같은 느낌? 지금은 ‘아빠도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는 않구나.’를 조금 알게 됐지만. (웃음)



아까 해외로 1년 동안 봉사활동 다녀왔다고 하셨는데 그 얘기를 해 볼까요? 어떻게 가게 되신 건가요?


제가 1학년 때 학교에서 해외 봉사 동아리를 했어요. 그 동아리를 통해서 베트남에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보육원 애들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 아이들을 또 봐야겠다 해서 그다음 2017년에는 기획 운영진에 들어가서 베트남에 한 번 더 갔다 왔어요.


그런데 운영진까지 하고 나면 한 번 더 활동을 못 해요. 2년이 최대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또 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당시에 저희를 인솔해주던 간사님이 계셨거든요? 그 간사님처럼 인솔자가 되면 나도 이 애들을 1년 동안 볼 수 있겠다 해서 그거를 지원해서 갔다 오게 된 거예요.


애정이 정말 대단하세요. 이 친구도 그 보육원에서 만난 친구인가요? 이 친구랑 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게 있을까요?


이 친구는 보육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친구예요. 보육원에서 줄곧 자란 아이들은 영어를 할 줄 아니까 영어로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는 영어를 하나도 모르니까 얘랑은 그냥 계속 몸으로만 노는 거예요. 제가 힘이 좋아서 맨날 이렇게 둘러업고, 돌리고… 그러면서 좀 친해진 아이예요.


그리고 얘가 진짜 좋아했던 건요, 방석이랑 목베개 갖다 놓고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방석으로 공격하고 진 사람은 얼굴 방어하는 게임 있잖아요. 그걸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도 많이 하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 게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언어가 생각보다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제가 그냥 한국말로 “야 그거 하지 말라고오~” 이러면 걔는 이렇게 쓱- 눈치 보고.


보육원 아이들의 어떤 점이 예뻤어요? 왜 그 아이들이 자꾸 보고 싶었어요?


(뜸을 들이다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주일밖에 못 보니까 그랬던 거 아닐까요? 일주일밖에 못 보고, 일주일 동안 아이들이랑 정말 즐거운 활동만 하고, 또 헤어질 때 되면 우리도 울면서 편지 쓰고, 걔네도 울면서 편지 주고 안아주고. 그러니까 그랬던 거 아닐까요?


그럼 반대로 1년 가셨을 때는 어땠어요?


그때는 이제… 그 친구들이 오히려 저를 챙겨주는 상황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요. 저는 베트남어도 모르고 그러니까 막 와서 말 걸어주고, 같이 놀자고 해주고. 그런 것들이 고마웠죠.


근데 하루는 아이들이 노는 걸 벤치에서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되려 드는 생각이, ‘나는 잠깐 지나가는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액자 안이 아니라 밖에서 보는 기분이었어요. 


나는 이 마을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1년 있다가 가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이 역할을 할 거고 그럼 또 이 아이들은 그분한테 정을 주고… ‘그냥 서로 지나가는 인연이구나.’라는 생각이 활동 중반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 기분은 슬픈 감정인가요?


슬프다기보단 덤덤하고 당연하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동안엔 ‘베트남 너무 좋아. 베트남에서 살고 싶어. 어떻게 하면 베트남에서 오래 살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차피 내가 가게 될 곳은 한국이라는 게 확 받아들여진 시간인 것 같아요.


그전에는 일주일 있다가 헤어지면 너무 슬프고, 통곡하면서 한 시간을 울고 그랬어요. 근데 이제는 정말 슬프고 아쉽지만 이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리고 처음에는 얘네를 이제 더 못 볼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보게 되고, 또 보게 되고 하니까 ‘지금 헤어지면 나중에 또 보면 되지.’ 이런 생각도 들고.



어렸을 때는 진짜 헤어지는 게 너무 슬펐어요.

이 많은 사진 중에서 특별히 조은 님이 아끼는 게 있다면 어떤 사진이에요?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들인 것 같아요. 왜냐면 지금 다 연락 끊긴 친구들이어서. 중고등학교 때는 되게 친했거든요.


어쩌다 연락이 끊겼어요?


친구들이 한 명씩 외국에 나가기도 하고,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끊기기도 하고. 이때가 정말 그리운데 뭔가… 사실 이제는 막 뭘 하고 놀았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요.


뭔가 아쉽네요. 그래도 중학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들일 텐데.


한 친구는 핸드폰을 아예 잘 안 봐요. 그리고 저도 SNS를 안 해서 다들 어떻게 사는지 알 수가 없고. (웃음)


사진이나 화폐 같은 옛날 것을 다 남겨두려고 하시는데, 관계에서는 되게 쿨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렸을 때는 진짜 헤어지는 게 너무 슬펐어요. 정말 어렸을 때 같으면, 만약 지금 이렇게 몇 시간 얘기하고 갈 때도 너무 서운한 마음에 집 가면서 ‘하… 이제는 다시는 못 보겠지.’ 이러면서 슬퍼했을 것 같은데, 좀 크면서 그게 덜해진 것 같아요. 제가 아까 말했듯이 해외 봉사 다니면서 많이 쿨해졌어요.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또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으니까…. 이런 사진들도 너무 그리워서 모아놓는 거라기보다는 그냥 있으니까 넣어둔 거예요.


그러면 혹시 과거의 무언가를 다신 볼 수 없어서 슬펐던 경험이 있나요?


음… 제가 외할아버지를 진짜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꽤 지나서 지금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져요. 내가 늘 떠올리던 몇 개의 기억만 남아있고, 그것도 진짜 기억인지 내가 자꾸 상기해서 만들어 낸 기억인지 잘 모르겠고… 어쩌다가 할아버지 사진을 보면, 내가 알던 그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건 진짜 슬픈 것 같아요. 다른 것보다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되게 어렸을 때 일이네요? 어렸을 때 일인데도 그렇게 슬프셨던 기억이 나세요?


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커서 두 분에 대한 애착이 되게 컸어요. 지금 기억이 나는 거는… 제가 학교 들어가서 애국가 배울 때가 되니까 할아버지가 애국가 반주 직접 연습해서 가르쳐주신 거, 아니면 구구단 가르쳐주신 거. 그리고 천장 보고 외할아버지랑 누워있는데 지수 알려주신 거. 2의 몇 승, 몇 제곱 있잖아요. 그거 알려주시면서, “네가 억만 천만을 쓰려면, 0을 다 쓰려면 너무 기니까, 저 위에다가 0이 몇 개인지를 표시하는 거야.” 이렇게 알려주셨던 기억. 밤늦게까지 할아버지 안 주무시고 옆에서 같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과학 다큐멘터리 봤던 기억. 그런 것들이 단편적으로 기억이 나요.


조은 님이 외할아버지랑 얼마나 친밀했는지 느껴지네요.


어른들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런 거 물어보잖아요. 그러면 저는 맨날 “나는 외할아버지!” 이랬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원래 제 이름을 가람이라고 짓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래서 할아버지 집 가면 “할아버지~ 가람이 왔어요~” 맨날 이러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편지 쓰면 항상 마지막에 ‘조가람 올림.’ 이렇게 썼어요.


참 애틋해요. 그러면 혹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날도 기억이 나시나요?


그냥… 아침에 일어났는데 뭔가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걸고, 그때 할머니가 울고 계시고… 그런 게 기억이 나요. 안방에 햇빛 가리는 창이 있어서, 이불이 깔렸긴 한데 분위기가 엄청 어둡고, 제가 이렇게 창을 등지고 문 쪽을 바라봤던 거. 또 장례식장 계단을 내려가던 장면이 좀 기억이 나고. 그리고 이모는 슬프게 우는데 저희 엄마는 안 울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어떻게 안 울 수 있지?’ 하면서 그 당시에 되게 섭섭했어요. 엄마 속도 모르고….


그리고 제 생일이 13일인데 18일에 돌아가셨거든요. 돌아가시기 전에 생일선물로 저한테 책들을 선물해주셨어요. 어떤 책들은 펼쳐보니까 뒤편에 할아버지가 써주신 편지가 있기도 했고. 그땐 초등학생이었으니까, 받은 책들 글자도 엄청 크고 동화책스럽고 이런데… 《플란더스의 개》 아세요? 지금도 그 책 보면 글자 이만한 거 보면서 엉엉 울고….

정말 사랑을 듬뿍 받으셨네요.


그리고 《뉴턴》이라는 과학 잡지가 있거든요. 애들이 볼만한 수준이 아니고 진짜 어려운 과학 잡진데, 할아버지가 그걸 제 이름으로 정기구독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뭔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뉴턴 오면 할아버지한테 선물 온 것 같아서 되게 좋아하고… 근데 구독이 몇 개월로 정해져 있잖아요. 그게 끝났을 때 저는 아빠가 그걸 끊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빠가 이거 끊었다고 되게 꿍해 있고 그랬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렇게 구독된 책이 오니까 위로가 많이 됐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리고 할머니한테 편지를 진짜 많이 썼는데, 그때는 제가 시 쓰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할머니한테 편지랑 시랑 써서 드리고 그랬는데, 그때 썼던 할아버지에 관련된 시가 있어요. 아직도 할머니가 저만 보면 “나는 그 시 아직도 외운다.”고 시를 막 읊어주시는데… 너무 민망해요. (웃음)


할아버지가 주셨던 책이랑 그 편지들은 아직도 당연히 가지고 계시겠어요.


네. 책은 책장에서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딱 꽂아놓고, 할머니가 주신 편지도 책상 서랍 제일 왼쪽에 있어요. 《뉴턴》 잡지도 하드커버 5권 정도를 묶어놓을 수 있는 커버에 아직도 꽂아놓고 있어요.




다음 화에서 계속.


다채 1호는 인터뷰이의 지갑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다름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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