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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채 1호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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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 Aug 24. 2021

알게 된 이상 멈출 수 없었던 저항

조 은 님의 지갑 인터뷰 - 2

엄마가 해왔던 일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엄마가 아닌 아빠를 멋지다고 느꼈다는 걸
최근에 많이 느끼고 반성하고 있어요.

2016년도 수능을 보셨네요? 저희는 조은 님이 수능을 본 지 얼마 안 돼서 수험표를 들고 다니는 줄 알았어요.


얘를 집에 꺼내 놓아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원래 있었던 자리에 이렇게 두고 있는 거예요.


왜 들고 다니세요? 버리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딱히 뺄 계기가 없어요. 그러게요. 제가 왜 이걸 들고 다닐까요? (웃음)


(웃음) 그러면 2016년도 입학 수능 보시고 어떤 과로 입학하신 거예요?


저는 유아, 아동 쪽에 관심이 많아서 애초에 원서 쓸 때도 다 유아교육과, 아동복지학과, 아동학과 다 이렇게만 썼어요. 결국 아동복지학부에 입학했고요.


왜 특별히 아동 쪽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냥 어디 가서 말할 때는 “동생들이 두 명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얘길 하긴 하는데 사실… 아기들 너무 귀여우니까요. 제가 또 뭐 만드는 걸 좋아해서 유치원 선생님이 되면 그런 걸 많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고, 좋아하는 애들을 많이 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해서 저희 과로 오게 됐는데… 막상 보육학 개론 이런 거 듣고 나니까 ‘아, 보육은 내 길이 아니다.’ 해서 지금은 복지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복지 쪽인데 좀 더 아동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복지예요.


아이들이 좋은 이유가 뭔지 더 자세하게 들어볼 수 있을까요?


(혼잣말하듯이) 특별히 아이들이 좋은 이유…? 딱히 어떤 이유로 아이들을 좋아한다 이런 건 없는데요. 제가 1년 동안 해외봉사를 하면서 느낀 건, 어른들끼리 대화하려면 이렇게 말이 통해야 대화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애들이랑은 그렇지 않아도 소통이 되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도, 그냥 손뼉 치는 것만으로 너무 재미있게 놀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아이들과의 교류에서 얻는 에너지 같은 것도 있고.


그러면 요즘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그런 거 보시면서 더 심란하셨겠어요.


어, 그런데 저는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래서 보육교사에 대한 처우 개선과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얘기를 하자면, 독일 같은 경우에는 어린 나이대의 아이들을 돌볼수록 더 교육받아야 하는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실 학점은행제 하면 바로 보육교사 자격증 이런 걸 딸 수 있으니까, 그런 데에서 오는 한계가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조은 님이 복지 관련 일을 하면서 진짜 하나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걸 바꾸고 싶으세요?


(생각 중) 음… 가사나 돌봄의 역할에서 남편과 아내가 평등하지 못한 부분들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되게 많아서… 예를 들면 가사노동, 양가 관계의 불평등 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육아의 불평등, 경력 단절로 인해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 것.


또 남편들이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를 써야 할 때 눈치를 보게 되는 분위기. 아니면 아동학대 사건을 다룬 기사가 나왔을 때, 남편에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채 엄마만 뭘 잘못했는지를 위주로 서술하는 그런 문제도 여기에서 파생된다고 생각해요.


공감이 많이 되네요. 그러면 조은 님이 생각하시기에 본인을 둘러싼 환경은 어땠던 것 같아요?


저는 저희 집이 제일 평등한 줄 알고 살았거든요. 엄마 아빠가 맞벌이하고 저희를 봐주시는 분은 따로 계셨는데, 예를 들면 아빠가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었어요. “집안일을 하는 거는 너나 아빠가 엄마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냥 가족 구성원이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하는 책임이다.” 이런 식으로.


그래서 ‘우리 집은 아빠가 제일 평등하다, 역시 우리 아빠 멋지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지금 우리 사회의 편견과 비교하면 낫지만, 그렇다고 이게 우리가 완벽하게 평등한 가정은 아니구나.’라고 느껴요.


예를 들면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고, 장을 봐서 어떤 걸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고. 지금은 저희를 봐주시는 분이 안 계시니까 아무래도 가사 일이 엄마 위주로 돌아가게 되고, 엄마한테 그런 걸 조금 더 기대하게 되고.


엄마가 해왔던 일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엄마가 아닌 아빠를 멋지다고 느꼈다는 걸 좀 최근에 많이 느끼고 반성하고 있어요. 그런데 애초에 우리가 이런 사회에서 자랐으니까 아빠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다 그렇게 사회화가 되어서 그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거리에 나가서 시위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그런 거를 하면서…
‘오늘도 저항했다!’ 하는 거죠.

고등학교 때 장기기증에 관한 특강을 들었는데, 장기기증에 긍정적인 생각이 있는 학생들이 뭘 써서 제출하고 받은 카드였어요. 만약에 제가 이 카드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면, 그럼 장기 기증이 되는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것까진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냥 나는 장기기증에 긍정적인 마음이 있다 정도를 보여주는 카드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먼 미래일 수 있는데 장기기증을 벌써 생각하고 계시네요.


진짜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던 건데… 제가 주사를 진짜 무서워해요. 해외봉사 갈 때도 예방주사 3개 맞는 게 큰 고비였어요. 그래서 평생 헌혈은 못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헌혈은 못 하니까, 장기라도 기증을 하자. (웃음) 이제 죽고 나면 어차피 내 몸은 쓸모가 없으니까.


봉사 정신이 정말 투철하신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제가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 이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오히려 저는 제 친구들 무리 중에 가장 그렇지 않은 사람 같고. (웃음) 저보다 제 주변 사람들이 더 사람들을 잘 챙기거든요. 그보다 저는 약간 ‘호전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호전적?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좀 거칠게 말하면 전투적인? 거리에 나가서 시위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그런 거를 하면서… ‘오늘도 저항했다!’ 하는 거죠. (웃음)


평화나비랑 비슷하게 또 저항하신 경험이 있을까요?


베트남 봉사단을 가기 전에 합숙 교육을 했는데, 그때 단체로 발표 같은 걸 해야 했어요. 근데 어떤 팀에서 언어유희로 말을 빠르게 해서 ‘병신년아’라는 말이 나오게, 그게 개그 코드가 되도록 플롯을 짠 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없이 그 플롯으로 최종 리허설까지 끝냈어요. 


따로 뒤에 가서 얘기했어도 됐겠지만, 그렇게 되면 흐지부지 넘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때 말하지 않으면 안 바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현장에서 손들고 마이크를 가져와서 말했어요. “아니, 아직 ‘병신년’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거 장애인 혐오고 여성 혐오다. 이미 2016년 시위 전부터 다 퍼진 이야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나중에 1년 파견활동이 끝나고 서로 편지를 썼는데 사람들이 “너 처음에는 싸가지 없는 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안 그렇더라.”라고 썼더라고요. 제가 어디 나가면은 그렇게 인상이 안 좋다는 얘기를 별로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저 스스로 호전적인 걸 발견하기 전까지 되게 온순한 타입이었고.


어떻게 온순한 타입에서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거예요?


그 기저에 깔린 것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를테면 ‘병신년아'라는 말을 한 게 문제라고 한다면, 그 전의 저는 ‘웃기려고 한 거였을 거야. 근데 조금 비속어를 쓰는 건 좋지 못하다.’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게 문제인지 알게 되니까 참을 수 없더라고요. 책으로 봐서 공부하는 것도 있고, 아니면 어디 세미나를 가거나, 정말 거리에서 경험으로 배우거나? 그런 것들이 쌓여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덕질은 다른 일보다도
제 안에서 느끼는 모순 때문에
관둔 게 좀 컸던 일이에요.


덕질은 언제 시작하셨어요?


2012년. 중3 때, 전교에 동방신기 좋아하는 몇몇 애들이 다 저희 반에 몰린 거예요. 교실 컴퓨터랑 텔레비전이 연결되어 있으면 걔네가 그 마우스의 주도권을 잡는 애들이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동방신기 영상을 틀었거든요. 그렇게 계속 주입당해서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김준수를 가장 좋아했고. 그런데 작년에 덕질을 끊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길게 좋아하셨어요? 어떤 점이 매력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어… 흔히 ‘덕질’을 한다고 하잖아요. 그 사람이 진짜 매력이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약간 중독인 것 같아요. 그냥 아침에 알람으로 김준수 노래 설정해놔서 그걸로 눈 뜨고, 일어나자마자 계속 검색해보고 유튜브에 봤던 영상 또 보고 콘서트 뭐 하는지 확인하고… 매일 그렇게 사니까 이거를 내가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이거 빼면 이제 내가 뭘 하지?’ 그런 생각.


그러면 멈춰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뭐예요?


음… 그것도 여성주의를 접하고 사회 부조리를 공부하는 와중에 결심하게 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콘서트 무대만 봐도 여성들은 성적 대상화가 되고 있고, 여성을 나노 단위로 성적으로 포장하는 그런 노래도 많아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는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해서 날을 못 세우고 있잖아요. 그걸 제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박유천 사건도 영향을 미쳤나요?


그 사건은 아직도 기억나요. 제가 대학교 들어와서 첫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일이 터진 거예요. 그래서 일단 떨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시험을 끝냈어요. 그러고 나서 과일 소주랑 불닭볶음면 하나 사 와서 혼자서 먹으면서 생각을 했죠. 나중엔 팬들 사이에서 무혐의라고 말하는 거에 저도 동조해서, 이 일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어요. 그러다 무혐의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사건을 통해서 어느 순간 알았죠. 그동안 무혐의라고 말하고 다닌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덕질을 그만하게 된 것 같아요. 박유천의 경우에는.


그러면 김준수도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건가요? 제가 잘 몰라서….


제가 2년 동안 김준수가 제대하기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거든요. 제대하기 전에 행사 뛰는 영상도 올라오면 ‘이야… (흐뭇한 엄마 미소) 역시 오늘도 노래 잘한다.’ 이러면서. 그리고 드디어 제대하는 날이 된 거예요. 제대하는 날 김준수 좋아하는 친구랑 전화하는데, 김준수가 군대에서 어땠는지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를 해줬고, 그게 되게 충격적인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그때 정이 확 식었죠.


그런데 왜 이 카드들 안 버리고 계세요? 그냥 이거 오늘 버리면 안 돼요?


모르겠어요… 이걸 모아 왔던 게 너무 아깝다고 해야 하나? 이거 보면 이건 내가 언제 갔던 콘서트, 이건 내가 누구하고 갔던 콘서트, 이건 나의 첫 콘서트 이런 게 생각이 나니까.


그러면 김준수를 못 버린 거예요, 아니면 그때 그 조은 님의 추억을 못 버린 거예요? 아니면 둘 다 못 버린 거예요?


하… (한참 생각하다가) 추억을 못 버리는 거 한 85, 김준수를 못 버리는 거 한 15 정도 되는 거 같아요. 제대 날에 사진이랑 노래를 전부 지웠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김준수 영상이 보이면, 아무런 반응이 없어야 끝난 거잖아요. 저는 그걸 계속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 김준수가 불렀었던 노래나 제가 좋아했었던 무대들이 생각이 나요. 그러면 ‘하지 마, 하면 안 돼….’ 이러다가 ‘그냥 찾아서 딱 한 번만 보자.’ 하고 보고. ‘진짜 멍청이 같은 짓을 한 번 더 했네….’ 이러고. 근데 뭔가 심적으로 힘들면 옛날에 좋아했었던 것들을 좀 더 찾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내가 위로를 받았던 거라든지, 내가 좋아했던 것들?


그게 더 카드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이 카드들을 사실 넣어놓아 봤자 1년에 한두 번도 안 봐요. 아마 이게 한 번에 없어져도 저는 없어진 것도 모를 거예요. 그런데 제 손으로 못 버리겠어요.


이 덕질을 그만두기까지의 과정에 정의구현과 여성주의가 포함되는 거죠?


이 덕질이야말로 딱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핵심 사건인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했던 결심 중 가장 힘들었던 결심이 아닌가… 그런데 정의구현까지는 아니고요. 정의구현이라면 제가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거잖아요. 이거는 그냥 제 개인적인 일이어서 제가 가장 크게 모순을 느끼고 있었던 거 하나를 노력한 그 정도?


맞아요. 아까 정의로워 보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셨는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덕질은 그것에 굉장히 방해되는 일인 거죠?


네… (고민하다가) 만약 제가 김준수 좋아하는 거를 제 친구들에게 말을 안 했고, 제 친구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었다면 저는 뒤에서 몰래 김준수를 좋아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미 김준수를 좋아하는 동시에 여성주의를 따르는 사람으로 제 주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모순적인 사람처럼 보일까 봐 덕질을 접은 게 아닐까요. 덕질은 다른 일보다도 제 안에서 느끼는 모순 때문에 관둔 게 좀 컸던 일이에요.


그런데 아까 제가 무언가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그랬었잖아요. 진짜 김준수 너~무 싫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예를 들면 옛날에 인터넷에 ‘시아준수’ 치면 나오는 자료들 있잖아요. 그런 자료들이 없어지는 건 너무 아쉬워요.


그때 그 시아준수? 지금 김준수 말고?


네. 흔히 그때라고 하면 2007년 즈음인데, 2012년부터 좋아했으니까 저는 그때의 시아준수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런데 옛 자료들이 없어지는 거, 아니면 홈들이 하나씩 닫히고 그 페이지에 있었던 영상이나 사진이 다 없어지는 이런 게 아쉬워요.


(놀라며) 그것도 하나의 과거니까?


그냥… 원래 있던 건데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되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


다채 1호는 인터뷰이의 지갑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다름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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