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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채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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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 Mar 22. 2022

나는 자유인이다

'목표의 부재' 네 번째 인터뷰

다채 4호는 '목표의 부재'라는 주제로 네 분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각각의 인터뷰이 분들께 '목표' 하면 생각나는 물건을 들고 와 달라고 요청드리고, 그 물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인터뷰에 대한 편집진의 답변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인터뷰이 ㅣ 배종숙

에디터 ㅣ Seney, 장혜주


종숙님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담았어요. 인터뷰를 읽기 전에, 혹은 읽고 나서 감상해보세요!




마지막에는 섬에 가닿으면
제일 좋겠어요.


‘목표'하면 생각나는 물건이 책 <섬>이라고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장 그르니에 <섬>이라는 책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막연하게 섬을 동경하게 됐어요. 그냥 어떤 현실적인 것들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졌을 때, 나는 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스물세 살 때 처음 혼자 여행을 갔던 곳도 ‘욕지도’였거든요. 너무 편안하더라고요. 섬이 마치 내 고향 같은. 서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서울은 고향 같은 느낌이 없잖아요. 마음 붙일 데도 없고. 그래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서울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욕지도라고 얘기해요. 꼭 태어난 곳만 고향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도 있는 거니까. 지금까지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고향처럼 드나들고 있어요.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롭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isole-) - 섬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 뿐인’ 인간들. (124쪽)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돌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95쪽)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92쪽)



섬에서 어떤 걸 이루고 싶으세요?


저는 목표 같은 걸 막 정해놓고 나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이런 스타일은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탁탁하는 편이에요. 선뜻 여기 작업실 얻을까, 이러면 거기가 작업실이 되는 거고.


마음속에 ‘이런 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날 보면 내가 그걸 하고 있는 거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삶의 리듬에 나를 맡겨서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면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섬에 가닿으면 제일 좋겠어요. 거기서 커피, 차 이런 걸로 사람들 마음도 치유하고 이러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커피가 없었으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싶어요.


왜 커피나 차인지 궁금해요.


너무 힘들었던 시기에 혼자 그리스로 떠난 적이 있어요. 그때 돈을 많이 들고 가질 않아서 하루 식비가 정해져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먹는 커피가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 동안 커피를 매일 하루에 한 잔씩 밥 대신 사 먹게 된 거죠.


열차를 탈 때도 3등 열차에서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 역무원들이 따뜻한 차를 한 잔씩 주더라고요. 무슨 차인지는 잘 모르지만 마시면 조금 따뜻해지고 그러더라고. 이렇게 어디 가서 마셨던 커피 한 잔 아니면 추울 때 누가 건네준 차 한 잔이 내 삶에 굉장히 위안을 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스를 다녀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커피를 공부하고, 제 작업실도 만들게 됐어요. 회사는 그냥 월급 받고 일하는 박쥐 인생 같은 거라면, 커피는 조금씩 땅따먹기 하듯이 알아가면서 내 영역을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커피를 공부하는 시간에는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율이 일어요. 커피하고의 만남이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너무 행복한 인생으로 바꿔놓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커피가 없었으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싶어요.


사랑이죠. 커피는 배신할 일도 없잖아요. 내가 버리지 않으면.



(작업실 안을 둘러보며) 바다가 보이는 개인 작업실이라니… 너무 멋있고 부러워요.


그대들도 언젠가는 무슨 일을 하든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일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어요.


커피 작업실의 모습



늘 사는 게 팍팍하고
해야 될 일만 너무 많고
이런 게 힘들었어요.


커피를 공부하기 전엔 어떤 일을 해오셨어요?


저는 지금까지도 계속 직장을 다니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너무 할 일이 많은 거예요. 아이도 키워야 되고 살림도 해야 되고 또 돈도 벌어야 되고. 대부분 우리 한국 여자들이 겪는 그런 거지. 그냥 늘 사는 게 팍팍하고 해야 될 일만 너무 많고 이런 게 힘들었어요. 내 자아는 이렇게 있는데 그거를 제대로 표현하고 쓰다듬고 이럴 상황이 못 되다 보니까 늘 삶이 무겁고 외롭고 그런 시간이 좀 많았었죠.


언젠가는 저녁에 잘 때 그냥 죽으면 좋겠더라고요. 내가 내일 아침에 죽어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되게 많았어요.


둘째 영현이가 막 태어났을 때, 친정 부모님 두 분이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 일 끝나고 집에 오면 영현이는 유난히 예민해서 잠도 안 자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문 열고 들어가면 엄마는 쳐다도 안 보고 막 울고 있고, 울다가 코피도 터지고. 그런 게 너무 힘든 거야 나는.


그렇게 힘든 일을 겪다 보니까 애한테 마음이 잘 안 가더라고요. 이 녀석 때문에 내가 더 힘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영현이가 그런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았나… 엄마를 좋아는 하면서도 약간 틱틱거리고 자기를 잘 안 드러내고 대화를 안 하려고 하고 그런 시간이 좀 많았었지.



저도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아드님 입장이랑 종숙 님 입장 다 공감이 돼서 마음이 아프네요.


영현이가 말을 안 해서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사실 많이 외로웠대요. 엄마는 직장 때문에 다른 데 가 있고 아빠는 새벽에 들어오다 보니까… 원래는 형이랑 같이 지냈었는데, 형도 서울 가버리고 혼자 빈 집에 덩그러니 있었던 거죠.


밤에 빈 집에 오는 게 너무 힘들었대요. 그래도 빛이 있을 때 집에 들어오는 게 덜 외로워서 야자를 안 하고 집에 왔었대요. 혼자서는 공부가 잘 안 되다 보니까 게임만 하게 되고. 그런 걸 알고 나니까 제 마음이 조금 아팠어요. 내가 마음을 헤아려주고 방향을 잡아줬어야 했는데…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어떤 한 영역을
구축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까 그리스에 혼자 갔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가게 되신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카잔차키스 묘비에 새겨진 비명이에요. 이 말을 엄청 좋아했었어요. 20대 때 나도 막 자유스럽고 싶은데 잘 그러지를 못하는 거예요. 맏이에 대한 부모님 기대도 있고, 직장도 있고. 나를 옭아매는 것들이 너무 많은 거야.


그러다 보니까 저 ‘자유'라는 말에 꽂혀가지고 언젠가 그리스에 가서 저 묘비명을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가장 힘든 시기에 과감하게 혼자 티켓을 샀죠.


막상 여정이 다가오니까 내가 과연 혼자 한 달 동안 여행할 수 있을까 두렵더라고요. 처음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었고 그리스어도 못하거든요. 애들이랑 회사까지 떼놓고 이렇게 요란스럽게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가지 말까 싶었지만 그래도 그냥 갔어요. 이렇게 현실이 반복되다가는 그냥 죽을 것 같아서.



묘비명은 결국 보셨어요?


못 봤어요. 풍랑이 일어 가지고 섬에 들어가는 배를 몇 번이나 놓쳤거든요. 대신 계획하지 않았던 새로운 곳들을 많이 가볼 수 있었어요.


하루는 지도를 보다가 어떤 해안가가 너무 예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도착하니까 밤 9시였던 거지. 어디서 불빛이 하나 새어 나오는데 '카페'라고 쓰여있었어요. 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 보니까 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고. 동양 여자가 갑자기 혼자 들어오니까.


처음에는 다들 나를 경계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손짓 발짓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배고프지 않냐면서 빵도 사다 주고 하더라고요. 어떤 분은 자기 집에 어머님도 있고 아내도 있고 딸도 있다면서 우리 집에 와서 자도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또 며칠은 그 가족들이랑 지내면서 정이 쌓이고 그랬지.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어떤 한 영역을 구축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마치 자유인이 된 것 같았어요. ‘여기서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 돌아왔을 때, 현실은 달라진 게 없었죠. 그런데 현실적인 것들이 자신을 옭아맨다고 해서 자유가 없는 게 아니더라고요. 결국 제 마음이 가벼워지니까, 이걸 깨달으니까 비로소 자유로운 거죠.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자꾸 그다음 거리가 궁금한 거예요.


어렸을 때는 어떻게 살고 싶으셨는지 궁금해요. 어린 시절의 종숙 님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제가 집에서 좀 멀리 있는 성수초등학교를 다녔어요. 버스를 타고 성수대교를 지나서 학교를 갔다 오고 했는데 어느 날 버스에서 혼자 졸다가 종점을 가게 됐나 봐요. 내리려고 하는데 내가 다니던 길이 아닌 거예요. 그랬더니 기사님이 원래 어디서 내리냐고 물어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시더라고요.


알려준 대로 길을 따라서 가다 보니까 새로운 길이 막 보이는 거예요. 안쪽에 또 다른 길이 있고, 또 길을 찾다 보니까 또 다른 세계가 나오는 거야. 그게 나한테는 되게 전율이었어요. 그러다가 날이 약간 어둑해서 빨리 버스를 타고 집에 갔는데 집에 사람들이 없더라고요. 다 나를 찾으러 나갔던 거지. 나중에 혼자 돌아와 있는 나를 보고 다들 놀라시더라고.


그게 내가 또 다른 눈을 뜨게 된 계기인 것 같아요. 자꾸 그다음 거리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거기를 또 가서 둘러보고 오고 그랬어요. 부모님께는 혼날까 봐 졸았다고 하고.


몇 번을 그러니까 집에서 난리가 났죠. 결국 엄마가 저를 가까운 학교로 전학시켜버렸어요. 근데 그다음부터 내가 외롭더라고요. 그래서 학창 시절에 늘 말이 없고 창가에서 하늘만 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특별한 목적이 없으니까 너무 재미가 없던 거죠. 



굉장히 모험적이셨네요, 그때부터. 앞으로는 계속 지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혹시 목표를 잃고 무기력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무기력하다는 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우리 안에는 원래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꿈틀거리거든요. 다만 그 에너지를 작동시킬 만한 계기가 없는 거야. 그럴 때 저는 여행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여행은 어쨌든 치열하게 어딘가를 찾아가야 되고 또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자기도 몰랐던 내 안의 에너지가 조금씩 작동되는 거지.


살면서 힘든 거는 당연히 누구나 있잖아요.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 그런 리듬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아요. 나한테 또 어떤 파도가 닥칠지 모르는데, 그걸 피해 가려고 하면 너무 힘든 거야.


나도 많은 걸 잃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는 죽을 것 같고 그랬지만 이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풀고, 커피를 하고 이러니까 옛날에 힘들었던 일들이 더 이상 힘들지 않고 그냥 행복한 거야. 이 커피만 있으면 얘가 나를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에너지인 거야. 그냥 그런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뭔가를 한다는 게.



가장 뜨겁게 목표를 향해 갔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전 인터뷰이가 종숙님께 남긴 질문이에요. 가장 뜨겁게 목표를 향해 갔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매주 서울로 공부를 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어요. 커피의 영역을 깊이 있게 확장해가던 시절이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배우는 즐거움이 가장 컸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성분들이 반응하는 것들을 몸으로 살펴가는 게 마냥 설레고 경이로웠어요.


그런 순간순간들이 있었기에 아이들 다 크고 이제야 가장 평온한 전성기를  맞고 있지 않나 싶어요. 내 안에 큰 깃발 하나 꽂고 있는 것처럼 든든하고 행복하거든요.


작업실 앞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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