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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채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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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 Mar 17. 2022

정처 없이 걷는 이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다채 4호는 '목표의 부재'라는 주제로 네 분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본 기사는 혜지님의 인터뷰에 대한 에디터의 답변입니다. 인터뷰이, 그리고 인터뷰이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에디터 |Seney


정처 없이 걷게 되는 날이 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마주 했을 때 종종 그렇게 걷곤 한다.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혜지님이 퇴근 후 하염없이 걸으며 도전을 망설일 때도 비슷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그럴 때 조금의 안정감을 주는 노래들을 모아 산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설(SURL)의 <The lights behind you>라는 곡을 들으면서 생각한 짧은 이야기를 써보았다. 


우리는 이미 지나온 벽들이 사실은 그렇게 높고 튼튼한 벽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듯
이 작은방 안에서
난 눈만 뜨고 있어
눈을 떠도 감은 듯해
공허함만 있는 난
벽만 보고 있어

설(Surl) <The lights behind you>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내가 가진 건 툭 치면 으스러질 낡은 사다리뿐이다. 벽을 넘기 위해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 보지만, 내가 디딘 칸은 하염없이 부서지고 내 몸이 아래로 추락한다. 몸과 함께 심장도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칸, 한 칸 계속해서 부서지고 그때마다 내려앉은 나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때, 벽의 바깥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튼튼한 사다리를 준비했어야지. 이미 늦었어.


이 벽을 넘을 자신이 없다. 사람들의 말처럼, 나에겐 튼튼한 사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주어지지도 않았고 나는 그걸 지니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높은 벽 아래 놓인 내가 보잘것 없이 작고 약해 보였다. 이곳에 기약 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니, 시간이 지날수록 벽이 점점 더 나를 조여오듯 숨이 막혔다. 뭐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땅 밑으로까지 추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 벽 안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길을 자유롭게 산책하는 상상을 했다. 노을의 끄트머리만 남은 푸르스름한 하늘, 이른 저녁의 깨끗한 바람, 나를 절대 재촉하지 않는 잔잔한 노래들을 떠올리며 걸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일지라도, 끊임없이 서로 새치기를 하는 어지러운 생각과 불안을 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벽을 넘어 내가 닿고 싶은 곳 어디든 내 두 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나를 조여오던 벽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And someone is knocking on
The other side of the wall
And make holes in my wall
Bright Light comes through the holes
And I found you through one of the holes

설(SURL) <The lights behind you>


벽에 손가락만 한 작은 구멍 하나가 생겼다. 그 구멍 사이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가 벽을 뚫고 있었다.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거대한 벽에 아주 자그만 구멍이라니.


구멍 앞에 조심스레 눈을 갖다 대었다. 어렴풋이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도 거기 있었냐는 듯이. 그러곤 내게 말을 걸어왔다.


"더 높은 벽이 생겼네?"

"응. 이번엔 정말 못 넘을 수도 있어."


누군가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하나, 둘, 셋, 더 많은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구멍이 조금 더 커졌다.


이제 구멍 사이로 작은 세상이 간신히 보였다. 구멍이 조금씩 커진다면, 지금은 미처 보지 못하는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언젠가는 벽을 뚫고 나와 자유롭게 세상을 누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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