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솔직한 웃음을 가진 그들
처음 러시아 땅에 도착했을 때 서류 작업 등 직접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물론 그 당시 내가 러시아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그로 인한 그들의 답답함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살짝 미소라도 지어주면 그게 그렇게 큰 일인가?!
웃음
웃음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예의상 억지로 웃기, 친절함 또는 친근함을 표현하기, 정말 너무 웃겨서 까르르 웃기, 다른 사람을 놀리는 비웃기 등. 내가 상상했을 때 대표적으로 일본, 미국은 자본주의의 웃음이 가득하다. 어떤 가게에 들어가도 항상 입이 귀에 걸리 듯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손님 입장에서 나를 반겨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니 낯선 땅에서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웃음이 가식적이라 속을 알 수 없고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일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인에게도 밝은 미소와 친절함은 기본적인 매너라고 느껴진다. 물론 이로 인해 서비스업에서 종사하시는 분들의 스트레스 또한 어마 무시한 건 또 하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여러 나라를 여행해 봤어도 러시아만큼 사람들이 웃지 않고 무뚝뚝할 수 있을까 싶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드라마 중에 미국인이 러시아에 와서 러시아의 문화를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가 있다. 길을 가다가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눈이 마주쳐 미국인이 씩- 웃자, 러시아인은 불쾌한 마음을 내비친다. 날씨가 좋아서 미국인이 분수대 앞에 앉아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자, 한 러시아인 할머니가 와서 돈을 주며 "불쌍해라, 바보인가 봐"라고 한다.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다니는 학교에서는 종종 이러저러한 주제들로 토론을 한다. 이번 주제는 '러시아인은 왜 웃지 않는가' 였는데, 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여기저기서 킥킥 대며 다들 너무 이 글에 공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 토론 시간과는 다르게 서로 말하고 싶어서 난리가 난 모습이었다. 다들 자신이 겪은 불친절함에 대해 마구 털어놓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온 한 친구의 표정과 말이 기억이 난다.
아침에 마트에 가서 물을 사다가 옆에 빵이 맛있어 보이길래, "이 빵도 살 수 있을까요?"라고 했더니 직원이 너무나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요?"라고 하니,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은 너무 흔하고, 그 러시아인 직원의 표정과 말투가 어땠을지 너무 생생하게 상상이 되니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이 여러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더니, 특정 상황들에 대해서는 그건 그 사람이 잘못한 거야,라고 말해주며 아예 그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주었다.
"Почему вы так грубите?"
"왜 이렇게 불친절하게 대하세요?"
세상에 다른 언어를 배우면서 이런 문장을 외우고 다녀야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은 재밌는 상황이었다.
러시아어 수업 시간에 읽었던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글쓴이: И.А.Стернин)
'러시아인들은 오랜 기간을 거친 기후 환경 속에서, 그리고 기나긴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또한, 러시아인들이 정의하는 '웃음'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라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건 맞다. 실제로 러시아의 기후는 1년 중 반이 춥고, 어둡고, 날씨는 빠르게 변한다. 갑자기 비가 왔다가 해가 쨍했다가. 특히 한겨울엔 해가 너무 짧고, 컴컴하니 사람이 우울해질 확률 또한 높은 것 같다.
길을 가다 보면 모르는 사이이지만, 가끔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보통 해외여행을 가면 모르는 사이여도 눈을 마주치면 옅은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화가 났나?라는 생각이 드는 표정까지 더해진다.
러시아인들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반드시 웃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러시아인들에게 웃음은 예의 바른 행동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말투와 표정으로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표현한다.
특히나 일을 할 때는 더욱 진지해진다. 아무리 서비스직이라도 웃음은 그들에게 의무사항이 아니다. 진지한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진지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되려 일을 하는 사람이 웃으면 일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웃는 일은 업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으로 따로 분류된다. 러시아 속담 '일 할 때 일하고, 놀 때 놀아라'를 정확히 지키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왜 웃어야 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유 없는 웃음, 단지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한 웃음은 짓지 않는 것이다. 내가 기뻐서, 내가 웃겨서 웃는 것이다. 심지어 '이유 없이 웃는 사람은 바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어떤 사람이 그냥 이유 없이 웃는다면 똑똑해 보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마트에서 직원이 무뚝뚝하게 대하는 건, 그 사람은 그냥 업무 시간에 본인의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고, 화가 난 게 아니며, 심지어 나는 만나면 반가운 직원의 친구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나한테 웃어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쓴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외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웃지 않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평생을 친절함이 가득한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오고, 고작 1년 반을 러시아 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솔직히 아직도 가끔은 무섭다. 여전히 마트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너무 불친절해! 그냥 좀 친절하게 해 주면 안 되는 거야?"라고 종종 한풀이를 해본다. 마트에선 아무 말도 못 했으면서. 그래도 이 수업 이후로는 '그래, 이 사람들은 그냥 본인 일을 충실히 할 뿐이고, 나는 그들에게 그저 모르는 사람인 걸'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큰 땅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모두가 다 무섭고 무뚝뚝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 비율이 높을 뿐. 처음 만났어도 유쾌하고 정 많은 러시아인들도 많다. 바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고 신이 난다. 그런 사람들은 매너 상 웃어주는 것이 아닌, 성격 자체가 쾌활해서 진심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마구 전달해준다.
모르는 사람끼리는 한없이 차가워도, 한 번 친해지고 마음을 주고받으면 정말 순수하고, 너무 따뜻한 사람들이다. 특히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서는 우리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도 느낄 수 있다. 알게 되는 러시아인들이 조금씩 생길수록, 그 사람들의 진심을 느껴갈수록 바깥에서 겪었던 설움들이 눈 녹듯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에게 가식적인 웃음이란 건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누군가를 만날 때 이 사람이 정말 웃겨서 웃고 있구나, 나랑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구나를 알 수 있게 됨으로써 그 웃음이 더 진심으로 느껴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