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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떠안게 되었는지도

by 휴지기

그저께 새벽 2시가 조금 안된 시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자주 내 핸드폰에 남편 전화번호가 뜨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이번에는 또 무슨 무서운 일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을까, 이번에는 또 어떤 불행을 말해주려고 전화했을까... 게다가 새벽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 좀 열어줘."

"무슨 문?"

"공동현관문"

"집에 왔어?"

"응"


새로 바뀐 공동현관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남편이 전화를 건 거였다. 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거실 소파에 나가 있었다. 남편이 중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고 있었다. 얼굴이 석탄 색으로 변하고 머리가 덥수룩했다. 어깨가 굽어가고 있고 키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남편은 경기도에서 울산까지 국도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왔다고 했다. 저녁을 먹지 않았을 것 같았다. 배가 고팠는지 평소에는 먹지 않는 맥주를 한 캔 사들고 들어와 소파 앞 거실 바닥에 털썩 앉았다.


"왜 국도로 왔어? 톨비 없어서?"

"그냥 뭐, 생각할 것들도 좀 있고."


'생각은 고속도로 달리면서는 못하나?' 했는데 말하지 않았다. 톨게이트 통행료가 없어 고속도로에 들어가지 못하는 남편이 미친 듯이 궁상맞았다.


들어가서 잔다고 했더니 남편이 자기 씻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남편은 맥주를 빠르게 마시고 또 빠르게 씻고 나왔다. 예전에는 씻고 나면 약간 해사한 느낌이 들었던 남편이었는데, 이제는 씻고 나서도 꾀죄죄하게 보였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다가 남편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말했다.


"왜? 늙었냐?"

"응. 이쁜 얼굴이었었는데 좀 삭았네."

"내가 누구 때문에 삭았겠어?"

"나 때문이지... 미안해."


나는 한 번도 예쁜 얼굴이었던 적이 없었다. 남편은 나에게 자주 예쁘다고 했다. 예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남편은 자주 했다.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가끔은 장난스럽게. 이런 말들 때문에 나는 남편의 천냥 빚을 떠안게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남편에게는 만 냥 빚이 있을 것이다.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끝없는 동굴이었다는 글을 여기에 쓴 적이 있다. 1년도 더 전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터널 안이었고 지금도 터널 안이라면, 여기는 터널이 아니라 동굴이 맞는 게 아닐까? 이미 나에게는 터널을 벗어났을 때 드러날 파란 하늘 따위는 없는 게 아닐까?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다시 뒤돌아가가는 것, 오직 그것밖에 없는 게 아닐까?


오늘 새벽 5시에 자다가 깼더니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안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남편이 거실 문만 닫아놓고 에어컨을 밤새 켜놓은 것이다. 아침에 남편이 일어났을 때 말했다.


"오빠, 에어컨을 켜려면 문을 닫아야지. 창문을 열어놓고 에어컨을 켜면 어떻게 해"

"미안. 몰랐어."

"몰랐다면 다야? 그렇게 생각이 없으니까 오빠 사업이 망한 거야! 왜 그렇게 살아 진짜!!"


남편은 아무 말하지 않고 출근을 했다.


나는 왜 이혼하지 못할까, 계속 생각한다. 나는 왜 이 어두운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까, 왜 뒤돌아서지 못할까... 결혼 12년 차, 남편 때문에 오래 힘들었다. 결혼 초반에는 나를 방치해서, 그 이후로는 남편 사업이 망해서. 내 고민거리의 대부분은 언제나 남편이었고, 아주 오랫동안 이혼을 고민했다.


그런데 왜 못할까? 찰나에 지나가버리는 남편의 달콤한 말들, 달콤한 행동들 때문인가? 모르겠다.


어쩌면 쨍하고 볕 들 날은 남편을 내 인생에서 없애버릴 때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그게 왜 이리 어려운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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