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들의 슬픈 대화

by 휴지기

점심, 짬뽕집에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남편: 그래도 갖다 버리지는 않네?

(주어는 나, 목적어는 남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자기는 그래도 나를 갖다 버리지는 않네?'가 될 것이다.)

: 버릴 거야.

남편: 요즘은 그때 생각이 많이 나. 우리 결혼 직전에 여기 울산에 내려올지 미국 대학원에 갈지 고민할 때 생각이. 그때 자기랑 같이 미국에 갔었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후회가 돼. 그때는 내가 여기서도 잘될 줄 알았어. 내가 똑똑한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더라.

: 그런 생각해봤자 뭐 해. 오빠 그리고 어차피 그때도 돈도 없었잖아.

남편: 없었지. 나는 항상 가난했지. 나 돈 없어서 4년을 고시원에서 살았다고 했었잖아.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엄마 당뇨 합병으로 쓰러져서 입원해 있을 때도 내가 똥오줌 다 받아내면서 공부했는데...

: 됐어, 짬뽕이나 먹어.



저녁, 남편이 만든 갈비찜을 먹으며


남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나:.....

남편: 자기가 가끔 나한테 무슨 생각하냐고 왜 말이 없냐고 물을 때 있잖아, 그럴 때마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왜 다들 나한테 잘못했다고 할까? 나는 진짜,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 다른 것보다 막 화가 나서, 화병이 나서 죽을 거 같아. 너무 억울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애."

: 그러게 말이야. 오빠는 나한테만 잘못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호구처럼 다 잘해주고 너무 열심히 일해서 나를 맨날 방치했는데. 그래서 아이한테는 아빠가 부재중인데 당연하잖아. 나는 항상 방치되고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었는데, 나를 방치하면서까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망했지?

남편: 미안해. 내가 자기한테는 진짜 할 말이 없다. 너무 미안해서.



밤, 천 원이 당첨된 복권을 또 다른 천 원짜리 복권으로 바꿔오며


: 있잖아 오빠, 내가 몇 년 전에 EBS에서 하는 피카소 전기 드라마를 본 적이 있거든?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말이야, 피카소 예술가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 중에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했던 거 같애. 근데 그 여자가 마음을 안 받아줬는지 다른 남자랑 사귀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자가 친구들 다 모여있는 카페 같은 곳에서 여자에게 총을 쐈어. 자기도 자살했던 거 같고. 그걸 보고 피카소가 생각해. '아, 이건 하나님의 계시구나. 나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하나님의 계시구나'하고 말이야. 요즘은 그 드라마 생각이 자꾸 들어. 왜인지 알 거 같아?

남편: 아니, 어려운데....

: 뭔가 의미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피카소가, 자기 친구들이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참을 수 없이 힘들겠어. 그래서 의미를 만들어 낸 게 아닐까, 친구들의 죽음의 의미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은 거야. 그러니까 오빠, 오빠의 불행도 뭔가 의미가 있을 거야. 오빠가 막 오래 살 거 같지는 않으니까 한 60대 중반까지 산다고 치고 지금 3분의 2 정도를 살아냈다고 생각하면, 그냥 오빠에게 올 절망들이 지금 다 온 게 아닐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지 않을까? 이렇게 억지로라도 의미를 만드는 거지.

남편: 그럴까? 잘 모르겠네...

: 아니면, 아니면 말이야, 우리 아이의 불행을 오빠가 땡겨쓴 걸 수도 있어. 오빠는 많이 노력하고 조금밖에 못 얻었지만 오빠 덕분에 우리 아들은 조금 노력하고 많이 얻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해. 오빠가 아이의 불행을 당겨서 좀 썼다고. 그러니까 아이는 편하게, 느긋하게 잘 살 거라고 말이야.



오늘도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경기도로 올라가는 남편에게 '오빠가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아 끄적이다가 보름달이 떴길래 기도를 했다. 나의 기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한다. 습관처럼.


남편이 불쌍해서 이혼하지 못하면 똑같이 불쌍해진다는데.... 이미 나는 불쌍해졌는지 모르겠다.




keyword
이전 18화엄마 또 술 마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