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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늙은 이지안

by 휴지기

일주일 전 일요일이었다. 오전 열한 시를 조금 넘긴 시간,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에게 물었다.


"오빠 커피 마실 거야?"

"응"

"뭐? 드립커피 아니면 커피믹스?"

"드립커피. 믹스는 배고플 때 하도 많이 먹어서"

"뭐야? 나의 아저씨 이지안이야?"


내가 우울할 때마다 더 우울해지고 싶어 여러 차례 챙겨본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가난하고 어린 여자 주인공 이지안이 배가 고플 때마다 커피믹스 두세 개를 한꺼번에 타서 마시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손바닥만 한 불빛에 의지해 커피믹스를 타마시며 허기를 잠재우는 이지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쓸쓸하고 안타깝다.


남편은 마흔이 훌쩍 넘었다. 절대 이지안처럼 어리지 않지만 가끔은 이지안처럼 가난한다. 남편은 너무 바빠 밥을 챙겨 먹지 못할 때가 많지만, 간혹은 진짜로 돈이 없어 밥을 챙겨 먹지 못할 때도 있다고 했다. 밤 아홉 시 넘어 들어온 남편이,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라고 하면서 가스레인지 위에 라면 물을 올렸던 적이 드물지 않았다.


남편은 자주 휴대폰 소액결제를 하고 그 금액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에게 휴대폰비를 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 한 번은, 내가 돈이 없어 휴대폰비를 내주지 못했던 달이었는데, 남편이 휴대폰이 끊긴 채로 거의 2주를 살았다.


무릎과 발목이 좋지 않은 남편은, 언젠가는 돈이 없어 16Km 떨어져 있는 곳을 걸어서 간 적도 있었다고 했다. 차로 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쌩쌩 달리는 차들 옆을 걸으며 남편은, 많은 불길하고 무서운 생각들을 했다고 말했었다.


나는 꿈이 크지 않았다. 결혼해서 남들처럼 사는 것, 남편과 나의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합쳐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집을 조금씩 넓혀나가며 그렇게 소박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 아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워내는 것, 그 정도였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 남편의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졌다.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 눈앞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또 하루하루 사는 것뿐이다.


어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이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호기롭게 오만 원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이상하게 나는 돈이 있으면 자꾸 자기한테 주고 싶단 말이야. 사무실에 놓고 왔어야 하는 건데"


꼴랑 오만 원을 주면서 생색을 내는 남편이 참, 우습고 짠했지만 나는 또 속 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그 돈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아들이 '아빠 나도 줘.'라고 말하자 남편은 아들에게 이천 원을 줬다. 아들은 책 살 때 보태라며 아빠에게 받은 이천 원을 나한테 건넨다. 아우~ 불쌍하고 찌질한 가족 같으니라고.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비 예보가 있었는데 가족 누구도 우산을 챙겨 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는 식당 창가에서 밥을 먹었는데 아무도 창밖을 내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아 비가 내리고 있는 줄 몰랐다. 식당에서 카카오로 택시를 잡고 나갔으면 비를 덜 맞았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불쌍하고 찌질할 뿐만 아니라 생각이 없고 멍청하기까지 한 가족이기도 한가 보다.


나의 아저씨 이지안에게는 박동훈 부장이 있었다. 자신을 도청한 이지안에게 찾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해주던 어른, 이지안에게 처음으로 '살았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 진짜, 진짜 어른.


나이는 딱 박동훈 부장인 남편은, 이지안과 더 닮았다. 늙은 이지안, 보고 있으면 안타까움과 쓸쓸함, 원망과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어쩌면 '나의'가 아니라 '남의' 남편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늙고 초라한 '아직은' 나의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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