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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12. 2023

지금 만나러 갑니다.

나의 우울에게 

"병원 한번 가보는 게 어때?"


그 말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내가 왜? 안가!' 나는 몰래 나쁜 생각을 품다 들킨 아이처럼 발끈했다. 그러면서도 그 길로 정신건강의학과를 검색했고 집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평이 좋은 병원에 진료 예약을 했다. 


예약 날짜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널을 뛰었다. '그래. 감기 같은 거야. 배워서 잘 알잖아? 다른 병원을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자.' 스스로를 달래다가도 '아니, 내가 왜? 그렇게 따지면 너도 가봐야 하는 것 같은데?' 하는 반발심이 일었다. 


예약일 전날이 되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무섭다고, 가기 싫다고 끝내 나는 눈물을 보였고 누구보다 날카롭게 굴었지만 막상 예약일이 되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예약 시간에 늦을까 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사실 사는 게 무기력해진 지는 꽤 됐다. 내 속에 스며들어 나와 함께 하는 우울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우울에 취약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우울을 유발하는 여러 사건들을 겪었다는 것도. 그저 인정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마주하기 겁났을 뿐이다. 


나는 괜찮다고,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버티고 버티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힘을 내보자고, 그래보자고... 쓰러져도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 파이팅을 외쳐댔던 나는 이제 없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하면 어때? 노력하지 않으면 어때? 가만히 좀 있으면 어때? 그냥 멍하니 있어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느껴가던 중이었다. 


어쩌면 지난한 길이 될지도 모르겠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나는 지금 내 우울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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