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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14. 2023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바람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처방받았다. 아주 약한 약이고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이 정도의 약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알겠다고 받아 들었지만 집에 오는 내내 검사결과지 봉투에 크게 적힌 "정신건강의학과"라는 글씨를 누가 볼까 봐 몇 번이나 가방을 확인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약봉투에 적혀있는 내 이름이 낯설다. 보고 또 봐도 내 이름이 아닌 것 같다. 정말 내가 우울증 약을 먹어야 하는 걸까. 아이들이 볼까 봐 나는 주방 수납장 깊은 곳에 약봉투를 숨겼다.


뭘 숨기냐고 당당하게 꺼내놓으라고 남편은 내게 말했지만 실은 그도 내 상태가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병원에서 뭐라고 했는지, 처방받은 약은 무슨 약이고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부작용은 없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것이 많았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면 좋겠다. 묻지 않고 그냥 기다려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 우울증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비단 최근 어긋난 버린 관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득 그 옛날, 우울증 약을 먹던 아빠를 정신병자 취급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지 아빠 닮아서 이상하다며, 넌 왜 그렇게 예민하고 유난스럽냐는 말을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엄마. 악담이란 악담은 내게 모두 쏟아내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던 엄마.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자 나는 더욱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그런 엄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울며 쏟아내도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유난스럽게 군다며 오히려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하던 엄마.


내가 아빠처럼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실을 알면 엄마는 뭐라고 할까? 내 우울증의 근원이 당신 본인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지 아빠 닮아서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까.


엄마에게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원망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러다 놓아버렸다.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서였다. 마흔이 넘어서도 엄마에게 폭언을 듣고 사는 나 자신이 비참했다. 그동안 엄마가 내게 했던 말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있는데 엄마는 그걸 정말 모르는 걸까.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모든 걸 안고 가야 하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엄마와 맞설 힘이 없었다. 그냥 안 보고 살고 싶어졌다.


엄마 얼굴을 안 보고 목소리도 듣지 않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한동안은 내가 못된 년이 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고, 남동생에게 엄마를 떠 넘긴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며, 날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제발.. 나 좀 살자."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을 나보다 괜찮은, 행복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동안 버티느라 고생 많았다.


우울증이 뭐 어때서? 하는 당당함이 생기길, 그리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길 바라면서 나는 처방받은 약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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