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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Oct 25. 2022

22화. 알코올 중독, 내 몸의 이상 신호(2)

내가 암일 수도 있다고?

 사부작사부작 책상 정리를 하는데 서류 봉투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작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지였다. 한 장 한 장 들춰보니 소견서 몇 군데에 밑줄 친 부분이 눈에 띈다.


 ‘신장, 유방 재검진 요망.’


 노란 형광펜으로 별표까지 해놓고 잊고 있었다. 반년 전에 재검사를 받았어야 했는데.


 며칠 후, 병원에서 유방 초음파와 신장 CT를 찍었다. 주삿바늘을 통해 몸속으로 조영제가 들어가자 손끝과 발끝, 요도가 뜨끈해졌다. ‘웅웅’ 소리를 내면서 기계 안에서 5초쯤 숨을 멈췄다가 길게 내뱉을 때마다 아이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꼬맹이, 아까 해 주고 나온 떡국은 남기지 않고 다 먹었을까?’


 한 끼 거른다고 굶어 죽는 시절도 아닌데 엄마들은 어딜 가나 ‘밥, 밥’, 어찌나 밥 타령을 하는지 그게 늘 불만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차가운 기계 속에 드러누워 아이의 국그릇이 얼마나 비었는지 걱정하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야간 CT 검사를 마치고 병원에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빗물에 주황색 알전구 불빛이 타닥타닥 튀는 걸 넋을 잃고 바라봤다.


 출렁이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집에 돌아와 슬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아이는 닳고 해어애착 인형의 귀를 움켜쥐고 배꼽을 내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검사 전 금식으로 몹시 허기졌던 나는 남편이 데워다 준 퉁퉁 불은 떡국 한 그릇을 후루룩 떠먹고 소파에 앉았다.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병원 가기 전과 어쩐지 다른 풍경이다. 식탁 위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색연필마다 끝이 뭉툭하게 닳아있었다. 내 관심 밖에서 혼자 놀던 아이의 시간이 보여 색연필에서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왼쪽, 오른쪽 색이 안 맞는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씻는 남편도 오늘따라 애틋하게만 보인다. 목 부분이 늘어나 쭈글쭈글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 남편. 내일 당장 내다 버리고(남편이 아니라 옷을) 이번 주말에 새로 하나 사러 가재야지. 특대형 고무장갑도 넉넉히.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은 4월 날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더웠다. 몇 주 사이에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 옷차림도, 병원 공기도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단,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는 의사의 표정만은 묵직하게 느껴졌다. 진료실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어 의사는 바깥 날씨를 보지 못한 걸까.


 ‘뭐예요……. 미간에 그 주름 좀 펴요... 어라? 왜 고개를 45도 기울이는 건데요?'


 나는 의사의 치아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쓰읍’ 소리도, 손가락 관절을 꺾었을 때 나는 ‘딱딱’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내 신체 어딘가에 더듬이가 생긴 기분이었다.

 의사는 유방 초음파 사진에서 세 군데에 동그라미를 하며 내게 말했다.


 “얘네가 양성인지 악성인지가 중요한데……. 그걸 알려면 조직검사를 해야 돼요. 아니면 6개월 후에 재검사해서 추적 관찰을 하는 방법도 있고.”


 그 순간, 정리되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불안과 손을 잡고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멀쩡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2년 시한부 선고를 받고 정확히 2년 만에 죽었어.’ (키친 드링커 19화 참고)


 두려움이 6개월 동안 나를 갉아먹게 놔둘 수 없었다.


 “조직 검사, 할게요.”




 검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사이에 마취가 풀려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1층 로비에 있는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어 있다가 비척비척 약국으로 걸어 들어가 타이레놀 한 통을 샀다. 인도 한쪽에 서서 타이레놀 두 알을 입 안에 탁 털어놓고 고개를 젖혔는데, 눈앞에 새하얀 목련이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빌어먹을 목련. 왜 이렇게 쓸데없이 예쁘고 난리야…


 나는 서대문역 4번 출구 앞에 있는 목련 나무 아래에서 붕대로 칭칭 감아 매어 판판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2022년 사 월의 첫 번째 날이었다.


 주문을 외듯 입 밖으로 아이 이름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분명 오늘 날씨는 아주 맑은데 내 그림자에만 똑.. 빗물 같은 게 떨어졌다.


 하필이면 점심시간이라니...

 고층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식사 메뉴를 고민하며 내 곁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바쁜 걸음들 사이에서 내 시간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유방외과 전문의의 말에 따르면, 알코올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여성 호르몬의 하나인 ‘에스트로겐’이 생성되는데 이것이 유방에 종양을 발생시키거나 종양의 크기를 키울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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