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 몽당연필 Oct 25. 2022

23화. 감정적 숙취에 굴복하다

나만의 안전지대, 술병 뒤

 유방 종양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키친 드링커 22화 참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덮쳐오는 두려움 앞에서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얼어버렸다.


 8시가 다 되어서야 몸뚱이를 일으켜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화장실.

 거울 앞에서 상의를 걷어 올린다. 멍으로 검게 얼룩진 가슴 위로 내 것이 아닐 것 같던 ‘암’, ‘죽음’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박히며 공황에 빠진다.


 ‘아침마다 아빠가 까맣게 태운 계란 프라이를 먹고 등원할 아들, 자다가 깨서 새벽마다 목 놓아 울며 엄마를 찾을 아들, 옷깃에 누런 때를 달고 출근할 남편……. 세탁기 사용설명서를 어디에 뒀더라? 조개껍데기는 음식 쓰레기가 아니라 종량제 봉투에 넣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줘야 해. 우리 아들 잠자리 독립도 얼른 시켜야겠다.’


 ‘손톱만 한 혹 덩어리 몇 개에 죽긴 왜 죽어.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두 남자 때문에 편히 눈이나 감겠어? 무엇보다 ‘나’를 잘 데리고 살지 못한 채 병상에 눕거나 죽게 되는 건 억울해서라도 살아야겠어!’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한 집착은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술병에 다시 손을 뻗게 했다. 결국 ‘*감정적 숙취’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감정적 숙취란?
 알코올 전문의 조근호는 <중독으로부터 회복을 위한 12단계>에서 ‘술을 많이 자주 마시는 문제, 그리고 술로 인한 숙취만이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아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술밖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믿음, 나의 억울함은 술밖에 달래줄 수 없다는 생각,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 등의 ‘감정적 숙취’ 또한 실제 숙취와 마찬가지로 나의 삶을 제약하고 있으며, 회복을 위해서는 이를 이겨내야만 한다.’고 서술한다.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에도 바쁠 그 시각, 나는 술병 뒤로 도피하여 더욱 철저히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이전 22화 22화. 알코올 중독, 내 몸의 이상 신호(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