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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Oct 26. 2022

24화. 닥치고 그냥 일어나!

알코올 중독자의 구차한 핑계들


 아침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겨우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가니 빈 술병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제때 버리지 못한 음식물 쓰레기가 악취를 토해내고 있었다. 빨래 바구니에는 두 남자의 양말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래, 너네는 나갈 데라도 있지…….’


 거뭇해진 양말 몇 짝에 공연히 화가 나서 베란다 문을 거칠게 닫고 다시 누웠다. 오늘 밤, 비워지지 않은 바구니에 양말 두 켤레가 더 얹힐 것이다.


 아침도 거르고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해 봤다.

 즐거운 음주에서 가학적인 폭음으로 이어지는 다리에는 '퇴사'와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또렷이 쓰여 있었다.


1. 퇴사, 그리고 상실감

 퇴사의 이유는 '육아'였는데, 아이가 등원한 후 뭉텅 비어버린 시간을 나를 위해 어떻게 쓸지 계획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강박적으로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이런 잡다한 일들과 맞바꾼 나의 업적을 되새겼다. 석사 학력, 우수 직원 표창장, 성과급 같이 반짝이던 성취가 소파 밑 먼지 덩어리와 함께 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봤다.


 나갈 곳이 없으니 곱게 단장할 이유가 사라졌다. 옷, 액세서리, 화장품 등 품위유지비에 투자하던 비용을 알코올을 소비하는 데 썼다. 육아를 위해 나 혼자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피해 의식'과 사회에서 영원히 도태되어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안주 삼아 혼술 하기 시작한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을 곱씹으며 술을 마시다 보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꼬여만 간다. 원망할 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족마저도 미움의 대상이 된다. 한때 잘 나가던 사회 구성원이 경제력 제로인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은 전부 사회 제도 탓이고 가족 때문이라며 폭음을 정당화했다.

 다음 날 술이 깨면 우울감과 자괴감이 무서운 크기로 커져 있었고, 그것과 마주하기 두려워 다시 술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술꾼처럼 술을 마시는 일이 부끄럽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감했다.


2. 불안과 우울에 마취제를

 나는 기질적으로 외부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이 약한 사람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남들보다 쉽게 불이 붙는 불안감을 가장 즉각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술'이었다.

 퇴사하고 얼마 안 되어 동료가 죽고, 장례를 치른 그 병원에서 우리 아들이 장기간 입원 치료를 받고, 전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하며 법원을 수없이 드나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미치지 않으려면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키친 드링커 19화 참고)


3. 중독자의 흔한 핑계일 뿐

 2번까지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내 안에서 엄중한 경고가 들렸다.


 '닥쳐. 핑계와 합리화는 알코올 중독자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행동 패턴이라고. 넌 중독자고, 알코올 때문에 온갖 정신적, 신체적 아픔을 겪고 있어. 퇴사는 그 당시 육아를 우선순위에 두었던 너의 선택이었고, 술 대신 우울과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게을러 빠진 네가 찾지 않았지. 천천히 생각해 봐. 아직 늦지 않았어.'


 그 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뒤집어썼던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당장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있을 곳은 어두컴컴한 방 안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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