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
먹다 남은 한 알의 사과를 베어 물고, 베어 물고, 또 베어문다.
남은 부분을 다 먹고 나면 깨끗하게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파내도 파내도 씨앗은 남더라.
사랑이었나 보다.
적당한 영양분과 물이 없음에 다시는 사과가 되지 못하는 애달픈 씨앗 하나를 땅 속에 묻어둔다.
언젠가 사랑이라는 또 다른 씨앗 하나가 심기어지면, 탐스럽게 열매를 맺어보지도 못한 사과씨 하나가 있었는지 조차 모르게 되겠지.
사랑이란, 얼마큼의 시간과 함께 맺힌 열매를 먹어서 없애버려도 소화되지 않는 씨앗 하나. 못다 한 사랑은 끝내 동그란 사과가 되지 못한 한 알의 사과씨와 닮았다. 달콤하게 자랐던 사과와, 애써 곱씹고 베어 물던 시간들 끝에는 다시는 자라나지 못할 한 알의 사과씨와 나 자신만이 남았다. 남아있는 사과씨가 마음에 걸려, 후회라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맺힌 만큼의 사과를 참 맛있게 먹었단 말을 삼키고 또 삼킨다.
간직하고 싶으나, 결국 간직할 수 없는 씨앗 하나가 마음속에서 방황하다 깊숙한 곳 한 자리에 소리 없이 묻힌다. 성장이 멈춘 한 알의 사과씨는 아마도 그렇게 숨이 막힌 채 잠에 들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오로지 당신만이 공급할 수 있는 영양분과 물.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마 그땐 확실히 사과씨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언젠가 탐스럽고 빨갛게 익어갈 것을 기대했던 한 알의 사랑을 나는 그렇게 떠나보냈다.
-사과씨
심장은 빨갛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심장은 빠르게 뛰며 빨갛고 싱싱한 혈액을 온몸으로 보내고, 그러다 동그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동그랗고 빨간 입술에 눈이 가기도 하고, 감정은 온갖 붉은 열정을 뿜어대며 위, 아래로 솟구치기도 한다. 먹어도 먹어도 갈망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과육이 그리도 달달한 탓일까. 꼭 탐스럽게 열린 붉게 익은 사과와 닮았다.
마음을 종이처럼 단번에 접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랑이 소멸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끝나버린 사랑의 시간도, 열매가 맺혔던 시간만큼만 곱씹다 없어지는 것이라면 참 편하겠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정작 마음속에서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 마음을 다 소모할 때까지 그동안 자라난 열매를 곱씹어 보기도, 눈물로 쏟아내보기도 한다. 더욱 애달픈 것은 그 모든 시간이 다 끝나고도 한 알의 '사과씨'와 같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순간이다. 미련과도 같은 사과씨는 다시금 영양분과 물을 공급받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를,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라곤 한다. 어떤 사랑은 끝나고서도 꽤나 긴 시간 마음에 묻어두는 조그마한 하나의 사과씨 같다.
그런 사랑을 해 보았는가?
어쩌면 누군가에겐 어떤 사람과의 사랑이, 누군가에겐 좇아왔던 꿈에 대한 사랑이, 누군가에겐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사랑이 될 수도 있겠다.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 '탐스럽고 빨갛게 익어갈 것을 기대했던 한 알의 사과씨'를 마음속에 묻었던 날의 당신에게 이 글을 부친다.
우리가 묻었던 사과씨는, 비록 동그란 사과가 되지는 못했으나 함께한 시간만큼 맺혔던 사과는 참 빨갛고 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미처 한 알의 사과로 완성되지 못한 채 묻을 수밖에 없었던 씨앗 하나가, 언젠가 우리의 토양이 소화해 내고야 마는 마음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참 동안 마음에 걸려있던 한 알의 사과씨를 이곳에 토해내고, 나의 빈 마음에 당신이 묻어둔 씨앗 하나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