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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답답할 때 마시는 묘약

ep.06

by 유자씨




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외면하고 싶다.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문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냉동실속 봉지괴물들이 내 심기를 건드린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뒤집어 정리하던 아이옷을 정리해야 하는데 자꾸만 미루어댄다. 옷을 꺼내 입힐 때마다 뒤죽박죽 섞여있는 아이의 옷들이 꼭 내 마음 같아 심기가 불편해진다. 괜스레 짜증이 나기도 하고 모든 게 다 싫어져서 옷장문을 쾅 닫고 서랍에 괜한 화풀이를 한다.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뒷베란다를 들락거릴 때마다 마치 내 마음이 쓰레기통이 된 것만 같다. 쌓인 먼지들이 나를 약 올리듯 노려보고 버리려고 하나둘 모아둔 안 쓰는 물건들이 쌓여 어느새 뒷베란다 한편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미니멀라이프를 한답시고 안 쓰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름 유지하려고 했건만 매번 내손길이 닿아야 하는 부분들은 신경 쓰지 않으면 금세 또 어지러워지고는 한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계속해서 미루고 외면한 공간 속 어지러움들은 내 마음까지 어지럽혔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외면한 걸까?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외면해서 마음속이 어지러웠던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딜레마겠지만 어찌 되었든 어느 하나를 끊어내지 않으면 무한한 어지러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이 답답하고 명치끝에 돌멩이가 하나 걸린 것처럼 자꾸만 숨을 크게 몰아쉬게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나와의 대화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답답하고 무겁게 만드는지 내 마음속을 헤집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착되어 뒤섞여있는 마음속 감정들은 쉬이 그 문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럴 때면 복잡한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묘약을 들어마셔야 한다.


나에게 그 묘약은 '청소와 정리'이다. 청소는 더러움을 없애는 행위이고, 정리는 물건들의 제 자리를 만들어 주는 행위이다. 이 행위들은 마치 서로 유착되어 있는 장기들을 분리해 내는 수술과도 같다. 아침에 일어나 <할 일 노트>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적어본다.


냉동실 정리

옷 정리

뒷베란다 정리

중고물품 내놓기


계속해서 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냉동실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가득 차오르는 봉지괴물들의 습격을 받은 냉동실은 마치 광산 속에서 광물을 캐는 듯했다. 언젠가 먹을 것이라는 명목아래 봉지 속에 봉인되어 있던 음식물들을 봉지들과 분리해 냈다. 숨 쉬지 못했던 식량들의 제 자리를 찾아주고, 냉동실 칸칸마다 닦아주고 나니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어쨌든 나는 봉지괴물들과 싸워 이겼다. 봉지 괴물들이 사라진 냉동실을 열어보니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후----'


길게 숨을 내뱉고 나니 답답한 마음속 숨겨져 있었던 진짜 내가 해내야 할 일들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조용히 공간을 들여다 보고 정리와 청소를 하다 보면 '진짜 내 마음이 답답한 이유가 그것이었구나.' 하고 이마를 탁 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뒷베란다 속 방치된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묵은 먼지들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이미 이렇게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데, 어째서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할까.'


어쩌면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나도 알지 못하는 내 마음속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토록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청소와 정리는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내 마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바탕 청소, 정리전쟁을 벌이고 나면 어느새 답답했던 마음이 깨끗이 맑혀져 있다. 서로 뒤엉켜 구분되지 않았던 마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대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 마음은 더 이상 답답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나만의 묘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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