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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y November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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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30. 2024

11월을 향유하다.

11월 30일






향유(享有)하다: 누리어 가지다.







11월 한 달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사실 내가 오기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이야기로 글을 써낼 만한 것들을 다 소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을 계속 글로 써낼 수 있을까? 내가 그럴 능력이 될까? 매일 글을 쓰려고 하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냥 해보자' 싶었다. 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것들에 대해서 미리 겁먹고 피하며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오기는 패기가 되었고 11월의 시작과 동시에 매일 글을 써 내려갔다. 미리 글을 써두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11월의 하루하루를 온전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사랑한다면 관찰하라고 한다. 관찰이란, 나의 생각이나 예측을 빼고 있는 그대로의 행동과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를 서술하는 것이라고 한다. 관찰이 없는 장난은 그저 본인 스스로의 쾌감을 위한 희롱이고, 상대방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관찰하며 치는 장난은 관계에서 윤활유가 되어 서로를 즐거움으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관찰한다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관심 있거나 사랑하는 대상 또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그냥 지나치게 된다. 예를 들면 임산부는 길을 걸으면 임신한 사람이나 아이들만 보인다거나, 내가 포르셰를 고 싶으면 길에 지나다니는 포르셰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매일 흘러가버리는 .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선생님께서 무작위로 이름을 불러 교과서에 있는 시낭송을 시켰다.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나는 교과서에 있는 시를 낭송했다. 선생님께서 나의 시낭송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 자리로 나를 불렀다.


"유하는 목소리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이 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 시낭송하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어. CA활동으로 상담수업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니?"


그 당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CA활동으로 상담수업을 들었었다.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연습을 했던 수업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도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거나 상대의 행동을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걱정이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선생님의 나에 대한 관찰로 인해 나는 내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목소리가 상대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선생님의 애정 어린 관찰이 나에게 때때로 힘이 되고는 했다.


그렇게 사물이나 사람, 현상을 관찰하기 좋아했던 나는 귀찮다는 이유로,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나의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그저 외면하거나 흘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11월 한 달 동안 글을 쓰려 붙잡고 늘어지는 모든 순간동안 나는 가을의 냄새, 풍경, 사람, 사건, 생각등 여러 가지 나의 마음에서 일렁이는 것들을 음미하고 나만의 언어로 써내려 애썼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압박감이 들거나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보다, 11월의 하루하루를 온전히 누리어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1월을 향유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문득 글쓰기는 밀가루 반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가루로 만들어둔 이 반죽으로 수제비를 만들 것인지, 칼국수를 만들 것인지, 빵을 만들 것인지, 국수를 만들 것인지... 내가 사랑으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관찰하다 보면 그 반죽이 어느새 수제비가 되어있기도, 칼국수가 되어있기도 했다. 내가 바라보고 싶어 하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의미 있는 글쓰기 대상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대만드라마 <상견니>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상견니에 미친 자, '상친 놈'인 나는 상견니 드라마 장면과 대사, 배경음악, 그리고 영화로 나온 내용까지 모두 섭렵했다. 상견니 포스터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只有你想見我的時候,我們的相遇才有意義。"

(오직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만남이 의미 있는 거야.)


이 문구를 보며 나의 11월들을 떠올렸다. 내가 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붙잡고 늘어졌던 모든 시간들이, 나로 하여금 11월의 모든 날들을 향유할 수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래도록 나에게 남아있을 24년도의 11월일 것이다.




이미지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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