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거울로 보면 우리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는 대답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대답을 몰라서 물어본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잠시 함께 걷던 걸음을 멈추고 딸아이의 앞에 가서 섰다.
"엄마 뒷모습 보여?"
"응. 보여. 뒤에서 봐도 우리 엄마야."
"그럼 이번엔 네가 엄마 앞에 가볼래?"
마치 신기한 실험이라도 하는 듯 재미난 표정을 지으며 쫄래쫄래 걸어 내 앞을 걸어갔다. 작아서 걸어 다니는 것조차 신기했던 딸아이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어느새 내 가슴팍만큼 자란 딸아이의 뒷모습을 나의 시선으로 유심히 쳐다본다. 볼록하고 동그란 뒤통수에 묶여있는 커다란 리본핀, 귀여운 딸기가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점퍼, 유독 팔이 긴 신랑을 닮은 긴 두 팔, 신랑과 똑 닮은 네모난 등판, 어느새 내 발 사이즈를 훌쩍 따라잡아 어른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커버린 발, 총총 거리며 걷는 두 다리. 찰나였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뒷모습을 스스로 못 보는 이유는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는 너랑 아빠가 함께 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사랑이 느껴지거든."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나도 다시 엄마 뒷모습 볼래!"
말똥 한 두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하굣길에서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서로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것들을 찾아내 맞추는 놀이를 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 언니 같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도 딸아이를 품에 안고 싶은 마음에 아쉽다. 내 품을 떠나 씩씩하게 학교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본다. 나의 눈에 담고 싶어서. 언젠가 나의 도움 없이도 온전히 세상으로 걸어 나갈 때에도 너의 씩씩한 걸음을 응원하면서도 미련스럽게 나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볼듯하다.
나의 사진첩에는 온통 신랑과 딸아이의 사진이 가득하다. '브이'하며 포즈 잡고 찍는 사진 말고, 두 사람이 걸어가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다 보면 늘 뒷모습이 찍힌다. 나는 뒷모습을 보며 사진을 찍지만 두 사람의 앞모습이 어떨지 눈에 선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지나는 알 수 있다.
대학교 전공수업시간에 주쯔칭(朱自清)의 산문 <아버지의 뒷모습(背影)>을 외운 적이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산문이라 교수님께서 문장을 외우는 과제를 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단어사전을 찾아가며 한 글자 한 글자씩 병음과 성조를 표시해 가며 외웠던 그 문장들이 아직까지도 한 번씩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한다.
等他的背影混入来来往往的人里,再找不着了,我便进来坐下,我的眼泪又来了。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다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자,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
산문 속 작가의 아버지는 힘들어진 집안 형편으로 인해 난징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길이었고, 작가는 학업으로 인해 북경으로 떠나는 길에 서로 동행하게 되면서 일어난 짧은 에피소드이다. 그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고 써 내려간 그의 산문을 외우며 나 또한 아빠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아빠의 모습이 여러 장면이 있지만, 그중 가장 선명히 기억에 남는 것은 우연히 밖에서 보게 된 아빠의 뒷모습이었다. 어린 내 눈에 키 큰 멋쟁이 아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샌 새치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집에서 막나 온 듯한 슬리퍼에 운동복 차림을 한 아빠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하교하는 길이었고 아빠는 아마도 집 근처 마트에 술을 사러 가는 길이었던 듯하다. 아빠는 날 보지 못했고,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어쩌면 나를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곱슬머리를 쓸어 넘겨 헤어젤로 고정시키고, 칼각잡힌 정장바지에 셔츠를 입고 긴 롱코트를 입고 다니던 키다리 멋쟁이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축 처진 어깨와 한숨 섞인듯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덥수룩한 머리를 한쪽 손으로 쓸어 넘기던 아빠의 초라해진 뒷모습이 속상하기도 밉기도 원망스럽기도 했다.
앞에서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을 가슴에 담아두었을 때. 받은 사랑이 너무 벅차올라 눈을 보면 울어버릴 것 같을 때.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울 때. 받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못난 내 모습이 미안할 때.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차마 전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 또한 여러 모습을 한 사랑의 형태라는 것을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깨닫고는 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뒷모습을 내어줌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가 아닐까. 가을 풍경 속 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오래도록 나의 눈 속에 담아두고 싶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