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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Apr 07. 2022

단 한 명의 장애인 학생도 만난 적 없다

밥벌이로서의_사교육 #16


 써야 하는 글을 쓰느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에 대한 이준석의 발언들을 고통스레 읽고 있었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출퇴근 시위에 대해 "시민의 출퇴근을 볼모 삼는 시위"라든가 "비문명적 관점"이라고 내뱉는 발화들은 그 자체로 저열했다. 욕 먹을까봐 2호선에서는 시위 안한다는 식의 조롱은 그냥 슬펐다. 저런 여당, 저런 대표.


 아니다. 사실은 더 나쁘게 말하고 싶다. 장애인 시민이 비장애인 시민보다 차등하게 대우받을 이유가 무엇인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권리는 모든 시민에게 주어진 것이다. 다른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야기한 시위가 맞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출퇴근의 불편함을, 아니 그 불편함조차 허락되지 못한 것이 그동안 장애인들의 삶이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지하철의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숨지기도 했다. 비장애인 시민 중 평상시에 내가 오늘 지하철을 타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 말을 바로 고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 그동안 비장애인들이 누린 교통 편의야말로 장애인들의 삶을 '볼모'로 한 것이다. 물론 같은 장소에서 남들이 죽어가도 제가 지각하는 것이 더 손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건 관심사가 아니었겠지만. 


 장애인 시민들의 존재를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그 처참한 공감 능력에 혀를 끌끌 차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 밥벌이의 현장이 바로 그 존재들이 지워진 장소가 아닌가. 그동안 나는 단 한 명의 장애인 학생도 만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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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학생들을 만난다. 기막힌 일들도 없진 않다. 학원 강사란 매장 직원과 선생님,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고 학생들 역시 고객님과 제자, 그 어디쯤에 있다. 그래서 자주 헷갈린다.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은 고객인가 제자인가. 제자로 대했다가 고객에게 쳐맞은 적 적지 않고, 내가 고객으로 대했다가 상처 입힌 제자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해서 종종 착각하기도 했다. 자칫 방심했다간 나 스스로를 선생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끔은 학교 선생보다 나은 존재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분명한 허세이지만 꼭 거짓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까울 때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이 서로 웃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그 시간들이 내게는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건 되레 무책임한 일일 게다.


 하지만 그 착각이 나를, 또 당신들을 잡아먹게 할 수 없다. 학생들 앞에서 나 스스로를 선생이라고 지칭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물론 괜한 체면치레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스운 줄 알면서도 유난스럽게 '강사'라고 자칭하는 이유는 혹여라도 이곳이 진정한 배움의 장소라고 학생들이 착각하면 안 된다는 노파심 때문이다. 학원은 그 어디보다 닫힌 세계, 당신의 세계가 이곳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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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를 제 발로 걸어나왔다. 학교를 가면 사방엔 모자란 남학생들뿐이었고 그래서 자폐의 유혹이 깊었다. 저치들과 엮이느니 나 스스로와 노는 일이 훨씬 더 값어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생각이 틀렸던 것만은 아니었는 듯하다. 학교를 때려친 나는 그 누구보다 외로웠고 비참했으며 즐거운 청소년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이들과 닿길 바라며 손을 뻗는 데에 주저 않았다. 하필 손을 뻗은 곳이 사람들이 소위 '빨갱이들'이라고 부르는 집단이었지만, 노조 조끼를 입고 팔뚝질 하는 아저씨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묘한 소속감을 느끼기도 했다. 맞아, 이건 내 청소년기에 대한 찬송이다. 내 10대는, 엄마 말대로라면 빨갱이짓으로 허비한 시간이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고도 생각한다.


 그 시간들이 이제와 소중했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경험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나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노조가 파업 같은 걸 해서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지도, 왜 괜히 데모 같은 걸 해서 길거리를 난잡하게 만드는지도, 왜 장애인들이 제 몸에 쇠사슬을 매걸고 지하철에 누워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지도 아마 그 시간들이 아니고서는 관심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학원은, 세계의 확장이 이뤄지는 곳이 아니다. 지식이 늘어날 수는 있다. 친구를 만들 수도 있고 좋은 강사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그 무엇보다 제 이익에 민감한 곳이다. 학생들의 성적 상승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고객들에게 강사들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곳이다. 자신의 이해에 골똘해지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이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삶 따위야 신경쓸 겨를이 없다.


 학생 개개인을 욕하고 싶지 않다. 내 밥벌이가 그런 것을 꼭 나쁘게만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분명히 더 넓어지는 곳은 아니다. 이곳은 장애인 학생도, 성소수자 학생도, 페미니스트 학생도, 빨갱이 학생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놓고 같이 이야기하며 서로의 세상을 함께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힘들겠지만, 어렵겠지만 학교라면 그런 걸 시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동안 그런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학생과 선생님들 덕에 학교의 모습이 보다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국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국어 강사이지만, 세상에 배워야 할 게 국어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 국영수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고 거침없이 떠드는 사람들을, 선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강사이고, 강사여야 한다. 선생이 아니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겠다. 같은 계급, 같은 계층, 같은 정체성, 같은 욕망으로만 구성된 이런 세상에 탐닉하는 것을 교육의 전부인 양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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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박완서)." 이번 주엔 써야 하는 글을 쓰느라 괜히 장애인의 이동권과 전장연의 투쟁과 이준석의 혐오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이라면 마땅히 거부해도 좋겠다. 그럼에도 쓰는 일이 나를 자폐에서 구하고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는 거의 유일한 일임은 틀림없다. 비록 그것이 한꺼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넓은 세상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어른이 되기를, 욕망한 적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좋은 어른은커녕 이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들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내 능력으로는 벅찬 일이다. 그 존재들을 만나려면 결국 내가 밖으로 뛰쳐나가는 수밖에 없겠다. 비록 한꺼풀이라도,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이루어지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이들이 전장연의 투쟁에 조금만 더 번민하길 바란다. 지워진 존재들을 잊어버린 우리의 죗값이다. 그리하여 단 한 명의 장애인 학생도 만난 적 없다는 것을 그동안 떠올리지도 못한 나의 죗값이다.


 그래서 쓰고 말았다. 그건 이번 주에 내가 써야 하는 글이었다.



 #밥벌이로서의_사교육 (16)


*

할 줄 아는 것 없는 사람의 고해성사 같은 것입니다. 그냥 죄를 그만 저지르면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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