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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인 Nov 15. 2022

구와 마젠타

3부-5장

2부


5장 




1부에 있던 것들이 깔끔하게 치워진 무대. 대신 1부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가득하다. 

조잡한 페인팅으로 가득 찬 파란색 가벽들, 

쓰레기를 꽉꽉 채워 야무지게 묶은 이문동 전용 쓰레기봉투 더미, 

송골매 신곡 모음 레코드판, 

작은 자개 문짝 같은 것들. 

소정과 민서, 라디오를 앞에 두고 있다. 

라디오가 장마철 폭우처럼 울며 드문드문 소리를 뱉어낸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굴삭기 소리, 

공사 소리, 

그러니까 뭔가를 부수고 깨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린다. 
 
라디오 소리 [신이문역…… 이문2동의 재개발을…… (앞두고-는 묵음 처리) 도시 재정비…… 

(위원회-는 묵음 처리)는 노후, 불량 건축물이 밀집해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이 필요한……]

 
 
소정, 세게 라디오를 한 대 친다. 

라디오가 뒤로 넘어가면, 민서가 다시 세운다. 


라디오 소리 [바가 있다고 밝혔는데……요. 이문2동 실 거주인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향후에 자세히 논의하겠다는……]


소정    듣지 말자, 그냥.

민서    정보가 있어야지. 그래야 준비할 수 있잖아.

소정    난, 진짜 모든 걸 다 알았는데 한 번도 준비한 적 없어. 정확하게는, 준비가 제대로 된 적이 없어. 

민서    그렇지만, 

소정    집주인은 뭐래? 

민서    방 빼라고…… 이번 달까지는……. 

소정    닦달하지? 그럴 줄 알았어. 

민서    그래도 확실하게 이야기했어! 문자로도 한 번 더…… 일론 머스크한테 답장은 받아야 하니깐……. 

소정    그래서, 집주인이 뭐래? 

민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소정    답은 해줬어? 안 나가도 된대? 

민서    (사이) 바쁘시겠지. 

소정    난 말이야. 집이 몇 채나 있으면 더 친절해질 거야. 집세가 밀리면, 물어볼 거야. 힘든 일이 있었냐고. 

 

라디오 소리 [민원이…… 이어지고…… 이는 곧 싸움으로……]


소정    (사이) 미안해. 

민서    뭐가?

소정    예민하게 군 것 같아서. 근데 화낸 거 아니다? (사이) 그냥 난, 약속된 게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해서. 집을 언제 나가라는 건지도, 안 나가면 쫓겨나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민서    조금만 더 기다리자.

소정    기다리기만 해?

민서    난 기다리는데 고민까지 해야 한다는 게 힘들어. 

소정    난 기다려야 할 게 너무 많다는 게 벅차.


 라디오는 끊겼다, 재생되었다를 애매하게 반복하고 지지직거리는 소리로 이어진다. 

그 새로 굴삭기 소리가 들린다. 

혹은, 뭔가를 깨고 부수는 소리가 라디오 소리를 덮어버릴 만큼 크다. 

소정이 귀를 막는다. 


소정    그리고 저 소리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 

민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소정    뭐라고?

민서    . 정. 적. 으. 로. 생. 각. 하. 자. 고.

소정    긍정적으로. 

민서    응. 맞아. 

소정    그게 안 돼. 차라리 북소리는 그래도 규칙적이고, 변수가 없잖아. 밥을 먹으러 가지도 않고 저녁때 즈음엔 전부 철수하지도 않고. 운명처럼 왔다가 운명처럼 멈추는데 저 소리는 너무 인간적 변수가 많아. 이번엔 뭔가를 깰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수고. 이번엔 부수겠지, 하면 깨고. 달려가서 미친놈들아! 고소할 거야! 하면 잠깐은 멈춰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내 의지가 반영될 것 같고…… 근데 사실 아니고…… 그게 아주 미쳐버리는 포인트야. 저것 때문에 긍정적인 사고가 안 돼. 

민서    그거, 정확한 표현이다. 


두 사람은 어느새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다. 

요란하던 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소정    사실. 얼마 전에, 그림을 그려 보려고 했거든?


민서, 조금 놀란 눈치다.


소정    학원에서 문자가 왔어. 수강 관련 문자…… 그러니까 옛날에 그리다가 만 그림 생각이 나는 거야. 

민서    구의 증명?

소정    알아?

민서    (사이) 사실 몰래 본 적이 있어. 네가 학원에 그림 모아서 낼 때……. 

소정    아. 포트폴리오. 그렇지, 그랬지…… 너도 봤으니까 알지? 미완성 습작인 거. 


 민서, 아무 말 없다.


소정    원래 습작이 다 그런 건데…… 그런 거긴 한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야, 텅 빈 부분이. 뭔가를 채워 보자 싶었어. 학원에서도 그랬고,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가 없어서. 근데 그러려면 밑에 흰 바탕색을 깔아야 하거든. 캔버스가 하얀데도 그래. 이상하지? 어쨌든, 난 진짜 채워 보려고 했는데 흰색 물감을 다 쓴 거야 하필. (사이) 그래서 그냥 못 그리게 됐어. 

민서    다른 색을 쓰면 안 되는 거야? 

소정    대체할 색 같은 게 없어. 그리고 대체하는 순간 비겁한 사람이 되는 거야. 

민서    그렇지 않아. 

소정    그림은 그래. 작품을 위해서는 아끼지 말아야 하거든. 겁 없고 당돌하게 임파스토를……. 

민서    난 그런 건. 몰랐어. 

소정    (약간 밝게) 아니다. 흰색이 있었어도 완성은 못 했을 거야.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서…… 다시 그리면 주변 색과 달라져버렸을 거거든. 티가 났을 거야, 저 부분만 다른 걸 보면 이 사람은 그림을 제때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이런 게. 그럴 바엔 완성하지 않는 게 낫지. 


 민서, 아무 말 없다. 

소정은 다시 민서의 표정을 살핀다.


소정    안 물어봐? 

민서    뭘?

소정    (장난스럽게) 임파스토가 뭔지. 

민서    어이없어, 진짜. 

소정    긍정적으로 생각해. 뭐, 세상엔 증명하지 못해 아름다운 것들도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민서    노력해 볼게. 

소정    그래. 그 김에 답장 왔나 확인해 볼까? 아까 혹시 우체부 다녀갔어? 

민서    몰라. 계단 올라오는 소리 못 듣기는 했어. 

소정    넌 소리가 제대로 들려? 

민서    아니. 그래서 신경을 문에 집중하고 있어.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소정    나도 앞으로는 그래야겠다. 


사이.


소정    미친놈. 

민서    우체부가?

소정    아니. 일론 머스크. 쓰레기 같은 놈. 

민서    욕하지 말자. 듣고 있으면 어떻게 해. 

소정    이런 걸 들을 수 있었다면 답장했겠지. 

민서    그렇지? (짧은 사이) 나쁜 놈. 죽어버려라! 

소정    이제 이 주가 다 돼 가는데. 

민서    근데, 해외에서 오는 거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어. 

소정    해외 우편물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나?

민서    응. 한 달 정도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잖아. 중간에 분실되거나, 다른 나라로 가는 배에 실리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리고, 앨런 마스크도 생각을 해 봐야 할 테니까…… 검토도 해 보고. 

소정    나는, 그렇게 돈이 많으면 생각할 시간은 하루면 충분하다고 봐. 돈도 시간도 전부 가질 순 없는 거야. 

민서    그러네. 우리는 돈도 시간도 없어. 

소정    그러니까 일론 머스크는 비겁한 데다 욕심쟁이인 거지. (사이) 확인해 보자. 내가 나가 볼게. 


 소정, 일어나 문 앞에 선다. 


민서    조심히 열어―. 


소정, 소매로 코를 막고 문을 연다. 

먼지가 한 번 인다. 


소정    (막힌 소리로) 빠르게! 


 소정, 달려 나간다. 

문이 닫힌다. 

혼자 남은 민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린다. 

지지직거리던 라디오에서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흘러나온다. 


라디오 소리 [오후 두 시, 꿈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이문3동 사시는 김소정 님 연락을 제작진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소정의 이름이 나오자 민서, 집중한다. 

소정은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돌고 돌아오고 있다. 
 소정이 올라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라디오 소리 [이주 전 김소정 님의 사연으로 오프닝을 열었었죠. 꿈을 포기하기 직전에 놓이신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꿈을 포기한 사람들 측으로 주소, 우편번호 보내주시면요. 저희가 김소정 님께 꼭 필요한 맞춤 선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소정 님을 그리고 소정 님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첫 구절로 라디오를 열어 볼 텐데요.]


소정이 올라오는 소리가 이런저런 소리들과 섞여 희미하게 들린다. 

민서는 라디오 소리에 집중하느라, 소정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라디오 소리 [오랫동안 헛된 기다림을 기다린 끝에, 나는 당신과 나 모두를 위해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문이 열린다. 

소정이 문을 연다. 

다시 한번 자욱하게 노란 먼지가 인다. 
 먼지 사이에 옷소매로 코를 막은 소정이 서 있다. 


라디오 소리 [고통은 하나의 아주 긴 순간-]


민서, 라디오를 친다. 

라디오가 뒤로 넘어가며 쓰러진다. 

소정과 민서, 대치하고 있다. 


민서    답장, 왔어?

소정    안 왔어.

민서    (사이) 기다릴 거지?

소정    할 수 있는 걸 하자.

민서    (비장하게) 그래, 그러면 기다리자. 


두 사람, 몇 번 콜록거린다. 


민서    문 조심히 열라니까. 

소정    고장 났어, 문도. 


두 사람, 가만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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