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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인 Nov 15. 2022

구와 마젠타

2부 킬링타임 -2-

소정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일기에서 발췌하는 것도 괜찮겠다. 진솔함이라는 게 있을 테니.


짧은 사이.


소정    엄마. 소정이야. 날이 참 좋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엄마가 대체 아빠의 뭘 보고 결혼한 건지 궁금해서. 얼굴이 양조위도 아니고. 톰 하디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뭘 보고 결혼한 건지 궁금했어. 인격 좋은 거? 그게 대체 얼마나 가겠어. 어차피 돈이 없으면 인격도 없는 건데 지금 아빠 봐 봐. 인격도 없고 돈도 없고 덕분에 나도 인격도 없고 돈도 없잖아. 그래도 나쁜 짓은 안 하고 살지 않았냐구 묻는다면 진짜 할 말은 없다. 나는 얼마 전에 홍대 입구역에 있는 화방에서 쉬민케 유화 튜브 두 개를 훔쳤어. 쉬민케 튜브는 35ml 낱개당 54,820원이야. 궁금할까 봐. 그리고 아빠는 기념일 날만 가는 애슐리 런치바에서 연어를 훔쳐 와서 다음 날 회사 도시락으로 먹었잖아. 이게 나쁜 짓이 아니라고? 조금 기가 차는 것 같기도 한 거야. 나는,

민서     (종이를 접으며) 종이가 잘 안 빠지네. 이 틈 사이로, 이렇게, 슉, 

소정    여기까지는 묵음 처리하기로 한다. 너무 진솔한 것도 별로니까. 이제 진짜 편지로 돌아가서, 다시, (편지 쓰며) 엄마. 소정이야. 날이 참 좋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편지했어. 나 딱 한 번만 해 보려고.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엄마 (민서: 슉!) 탓 아닌 거 알아, 아빠 탓 (민서: 슉!) 아닌 것도 알아.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도 않았고 죽고 싶지도 않았고 실패하지도 않았으니까 걱정 안 해 (민서: 마지막 슉!)도 돼. 근데 그냥 딱 한 번만 더 해 보려고. 미술 학원. 근데 엄마, 나 돈이 없어. 한 달 학원비만 부쳐주면 안 될까? 엄마 어깨 아픈 거 아는데 앞으로 더 아플 거잖아. 원래 나이 들면 더 많이 아픈 거잖아. 그전에 딱 한 달만……. 


소정, 편지를 구겨버린다. 


민서    슉 네 번을 하면, 이렇게 개구리가 완성되는 거죠. 고양이도 해 볼까요. 고양이가 조금 더 고난이도이긴 한데요. 조금 집중할게요. 

소정    고모부, 건강하시죠? 술 담배 안 하시고, 큰 수술받으신 적도 없고,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이에요. 다름이 아니라요, 고모부가 모으시는 마블 피규어 말인데요. 그중에서도 아이언맨2 피규어가 진짜 비싼 거라고 하셨었잖아요. 예약 구매 걸어놓으시고. 한 일 년 있다가 받으셨다고. 저 기억력 좋죠? 그거 말인데, 나중에 고모부가 자식이 없으니까요. 저한테 물려주신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거 미리 주셔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제가 이번에 유학을…… 그림을 다시 그려 보고 싶어서요. 삼촌이 꾸역꾸역 대학원까지 나온 건…… 학벌에 미쳐서지만…… 저는 사실 그런 거 다 상관없고 정말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니에요. 그냥 죽고 나서 주세요. 전 정말이지 고모부가 죽을 날만 기다릴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소정, 이번엔 편지를 잘 접어 주소까지 쓴다. 


민서    짠. 고양이. 이걸, 보내려구요. 고등학교 때 진로 선생님한테. 그 사람,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사실,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했던 말 중에 사실 틀린 말은 없거든요. 뭐라고 했더라― (손가락 접으며) 네가 자퇴하면 아마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지 않을까-? 딱히 하고 싶은 것 없이 할 수 있는 것 없이 허송세월이나 까먹지는 않을까―? 아니, 사실 그렇게만 지내도 다행인 거 아닐까―?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정말 다행이지 않을까?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이라도 벌 테니까.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 수라도 있을 테니까.


사이.


민서    소정아. 돈을 안 줄 것 같은- 돈이 없을 것 같은 사람한테는 안 쓰는 게 낫지?

소정    (편지지 꺼내며) 시간 낭비야. 이렇게 해. (쓴다) 아빠. 아프지만 마. 돈 들어. 


소정, 고민하다가 편지를 먹는다. 

그리고 경건하게 새 편지지를 꺼낸다. 


민서    돈을 줄 것 같은 사람…… 진로 선생님……. 아니고, 이 년 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샌드위치 가게 사장님……. 날 예뻐하긴 했는데……. 

소정    유진 언니. 안녕하세요. 완전 오랜만이죠? 제가 일방적으로 연락 끊은 다음에 처음 이렇게…… 안부 전하는 것 같은데. 기분 상하셨으면 푸세요. 저 언니가 저한테 잘해주신 거 알거든요? 가끔 장조림도 해다 주시고. 왜 그 맥도날드에 자두 칠러라고 있는데. 2,200원짜리. 저 돈 없어서 그것만 먹고 다닐 때도 언니가 샌드위치 같은 거 같이 사다 주시고.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그랬는데 알바 그만두는 날 언니가 사실 언니 부자람서요. 아빠한테 달 300씩 받는다 했나…… 알바 그냥 재미로 해 본 거라구. 인생 살면서 경험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근데 300도 좀 부족하다 그랬나…… 위로 있는 언니 오빠들은 더 받았다고. 지금은 가세가 기운 거라고. 저 완전 기억력 좋죠. 다 기억한다니깐요. 그런데 그냥 그거 때문에. 재수가 없어가지고. 그래서 연락 끊은 거거든요. 그냥 네. 그랬어요. 

민서    (접은 고양이를 먹는다) 마라탕 집 사장님…… 중학교 동창 유미…… 모르겠다. 이름이 유미가 맞던가. 유리 같기도 하고. 

소정    그러니까, 한 달 용돈만 저한테 빌려주시면 안 돼요? 

민서    나머지 사람은. (더 심각하게) 더 없을 것 같으니까. 말하지도 못한다. 


사이.


소정    두 달 용돈도 괜찮아요. 

민서    이래서 혼자 잘해 보려고 했던 건데. (종이 접으며) 그래도 난 자퇴하고 내 힘으로 두 달 치 방세를 마련했어요. 서울에서 이 가격에 이런 방 흔하지 않댔어요, 황금알 공인중개사 사장님이요. 집에서 독립하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이 집을 얻은 덕분에 운 좋게 소정이도 도와줄 수 있었고요. 

소정    고맙습니다, 항상……. 소정 씀. 


소정, 편지 접어 주소까지 쓴다. 


민서    나는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뭐든. 원망 같은 것도 없어요. 사실 진로 선생님도 골려주고 싶은 거지, 죽거나 차에 치이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거든요. 그냥, 다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타입. 그래도 조금 아쉽게 생각하는 거는……. 


민서, 한참을 고민한다. 


민서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방이 딱 하나만.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엄마랑 내가 조금이라도 떨어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우리 사이가 더 좋지 않았을까……. 


사이.


민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민다) 모빌도 완성. 

소정    꿈을 포기한 사람들? (사이) 아냐 됐어. 

민서    끝. 


사이.


민서    다 쓴 거 같지?

소정    난 하고 싶은 말 다 쓴 것 같아. 

민서    다행이다. 파파고도 잘 돌아갔지?

소정    대충?

민서    대충이면 안 되는데…… 이런 건 뉘앙스가 되게 중요한 건데……. 

소정    뉘앙스 잘 산 거 같아. 

민서    우리 예의 발랐지?

 

소정    응. 인사도 잘하고.

민서    자유의사도 존중하구. 나라면 준다, 이유 없어도.

소정    그래?

민서    간절하고 마음 아프잖아. 


사이.


민서    그리고 아까 말 못 했는데. 집주인 할아버지가 조금은. 미리 준비해두면 좋대. 

소정    뭐라고?

민서    여기― 없앤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 같대. 

소정    민서야.

민서    응.

소정    너를 옆에 두지 말았어야, 아니야. 

민서    무슨 말하려고 했어?

소정    그냥. 마음이 아프다고. 


암전 

더 이상 티브이에 어떤 것도 뜨지 않을 것이다. 




Killing tim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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