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제인 Nov 10. 2022

구와 마젠타

2부 킬링타임 -1-

Killing Time




엎드려 있는 민서와, 옆에 앉아 있는 소정.

두 사람은 서로, 아주 가깝게, 거의 붙다시피 있다. 


소정    우리는 축축한 방바닥에서 일어났다.


화면에 힘겹게 글씨 하나가 뜬다. 


[삼 년 후]

[  ?  ]

[삼일 후]


그리고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 사라진다. 


소정    삼 년 후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날 이후로 삼일 정도를 내리 기절해 있었던 거다. 우리를 발견한 건, 한 번도 방세를 밀리지 않았던 민서가 날짜를 밀려버린 것을 재빠르게 눈치챈 집주인이었다. 재개발이 본격화되고 우리가 집세를 내지 않고 야반도주라도 했을까 걱정되었던 집주인은 몇 번 방문을 두드려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마스터키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민서를 마구 흔든다) 

민서    응?

소정    일어나. 

민서    일어나래?

소정    방세 내래. 

 
 사이.
 

소정    집주인은 집 안 꼴을 보고 우리가 동반자살이라도 시도한 것처럼 굴었다. 

민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자. 

소정    나쁜 새끼. 

민서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인 거지. 이를테면 우리 집 천장을 고치는 데는 돈도 시간도 많이 든다. 그럴 땐 연락을 하지 않지만, 집세를 받는 일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찾아온 거지! 저런 게 진짜 어른일지도. 

소정    민서가 방세를 송금하는 동안, 그리고 송금 완료―라고 쓰인 파일을 집주인에게 보여주는 동안 나는 집 앞에 붙은―김치찌개용 돼지 전지를 할인하고 있는 이문동 마트 할인 행사 포스터와,  17,000원어치 전기세 통지서와, 미안한 마음을 담아, 파격! 30퍼센트 할인! 푸푸 아트 아카데미―라고 쓰인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민서    (예의 바르게) 죄송합니다.

소정    점포 정리로 김치찌개용 돼지 전지를 할인하고 있는 이문동 마트 할인 행사 포스터와, 17,000원어치 전기세 통지서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수강료. 30퍼센트. 할인. 파격! 푸푸 아트 아카데미-,라고. 

민서    (소정의 머리 누르며) 죄송합니다……. 언니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소정    쓰인 핸드폰 문자 메시지. 기간이 지난 건 아니겠지? (확인하고) 다행이다. 

민서    (소정 보며) 앞으로…… 조심해 달래. 집주인 할아버지가. 그리고, (말하려다 만다)

소정    뭔데? 무슨 일인데? 

민서    아니야. 조금 있다 얘기하자. 일단 집부터 치우면서……. 

소정    그래.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 다. 


소정과 민서는 인공정원을 부수고

우산을 접어 내려놓고 집을 정리한다. 

민서, 티브이를 보면서. 


민서    (소리친다) 고장 났어?

소정    (라디오를 옮기며) 고장 났어. 이것도.

민서    (소리친다) 진짜 다 고장 났어? 정말이야? 아니지? 


민서, 티브이를 때려 보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민서, 가만히 티브이를 내려다본다. 

소정은 그런 민서를 바라본다. 

민서, 티브이를 옮기려다 입고 있는 옷을 손에 두르고 코드를 뽑는다.

그리고 하나씩 옮긴다.

어느새 두 사람의 집에는 티브이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두 사람, 다시 모여 앉는다. 

잠시 정적. 


소정    지금 아마 민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민서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다른 건 제쳐두더라도, 

소정    다 그만두고 싶다, 같은. 

민서    미안한 건 확실하다고.


사이.


민서 그런데, 왜 미안한지, 누구한테 미안한 건지만 고민하면 될 것 같아서…… 그건 아직 모르겠어서……. 


민서, 고개를 숙인다. 

소정, 안타까운 듯 민서를 바라본다.


민서    다 그만두고 싶어. 

소정    미안해, 내가. 

민서    돈이 없으니까. 

소정    우리, 한 번만 더 해 볼까? 일론 머스크한테…… 물어보자. 마지막으로. 주는 거 말고, 빌려주는 거 어떠냐고. 나중에 성공하면, 테슬라만 타겠다고. 자율주행이 잘못되어서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에어백이 안 터지더라도. 아! 광활한 우주여행이라도 가겠다고. 세계 부호들이 가기 전에 먼저. 안전 테스트라도 해주겠다고. 편지 쓰자. 편지로. 

민서    하고 싶어? 

소정    하고 싶어? 

민서    마지막이야. 


소정과 민서, 고개를 끄덕인다. 

소정, 티브이 위에 종이를 올려놓는다. 


민서    일론 머스크 씨, 안녕하세요.

소정    하이, 일론 머스크.

민서    반갑습니다.

소정    나이스 투 미츄.

민서    그런데, 왜 자꾸 입을 여시나요? 

소정    와이 유 마우스 돈 셧다운?

민서    당신 주식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다고요. 

소정    아임 쏘 널비어스. 유어 스톡 윌 펠. 

민서    당신이 돈이 많아야. 아주 많아야 우리에게 줄 거 아니에요. 

소정    유 해브 투 어랏 오브 머니― 투 기브 어스 머니. 오케이?

민서    아니다, 아니에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소정    유어 하트 고잉 유. 킵 고잉, 킵 고잉.

민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소정    아이 원트 투 서젝트 섬띵…….

민서    우주는 아주아주 넓잖아요. 

소정    스페이스 이즈 베리베리 빅. 와이드, 베리 빅.

민서    그리고 당신은 우주에 돈을 계속 계속 쓰잖아요. 

소정    앤 유 킵 스펜딩 머니 온 갤럭시 어게인 어게인 어게인. 

민서    물론 쓸 수 있죠,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깐.

소정    유 캔 유스 유얼 머니. 오케이. 아이 언더스텐드.

민서    그런데 사실 이해는 안 가거든요. 텅 빈 곳에 자꾸 돈을 집어넣고, 집어넣고…….

소정    와이 두 유 푸싱 머니 인 더 엠티 스페이스…… 킵킵킵킵…….


두 사람은 점점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민서    이제 진짜 돈이 받고 싶은 이유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마치 돈 많은 사람들처럼,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맞다, 도피성 유학! 

소정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는데, 정말.

민서    소정이는 왜 도피성 유학 가면 안 되냐고. 소정이도 선택지에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정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었나. 사실 이젠 아무렴 상관없다. 

민서    나는 부러운 사람이 꽤 있거든요. 이를테면 소정이. 소정아, 좋아? 꿈이 있어서 좋아? 하고 싶고, 잘하는 게 있으면?

소정    옛날 언젠가 즈음에. 정확히 언젠지도 기억 안 나는 그 순간에는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민서    이렇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요. 

소정    고1 때 미술 학원을 한 달인가 다니고 짐을 뺀 적이 있다. 

민서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다 소정이랑 배운 건데, 요가랑. 공중곡예. 

소정    선생님이 붙잡아가지고, 너 진짜 갈 거냐고. 네 뒤에 백이십 명이나 있는데 진짜로 갈 거냐고. 열심히 하면, 진짜 이 년 동안 한 달에 이백오십만 원씩만 내면서 열심히 하면 서울 사 년제 회화과 갈 수 있을 텐데 진짜 갈 거냐고. 

민서    아! 그리고 종이접기. (사이) 해 볼까요? 


민서, 색종이 묶음을 꺼낸다. 


민서    뭐 해 볼까요? 프리지어? 모빌? 고양이? 개구리? 미니카? 

소정    그래서 집에 돈이 없어서 가야 한다고 했더니, 

민서    (손 치며) 프리지어보다는 장미가 나을 것 같다! 

소정    보내주던데. 우리 인연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깔끔하게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그때. 생각도 안 나도록 자근자근 밟아뒀어야 했는데. 적당한 학교에 적당한 과를 맞추어 적당히 살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으면. 그림이 아니라 토익을 따거나 스터디를 하거나 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벽화 봉사 같은 건 가질 말았어야 했는데. 민서를 만나지를, (사이) 아냐. 이건 아니다. 

민서    (종이 계속 접으며) 장미를 접을게요. 아무래도 장미에는 로망이 있는 것 같죠. 내가 본 소정이 첫 그림도 장미였어요. 마젠타 색 벽에― 봐 봐요. 감명을 받았으니 마젠타, 라는 이름도 안 까먹고 기억하고 있죠. 눈이 쨍해질 정도의 분홍색 벽에, 소정이가 장미를 그렸거든요? 나는 그런 건 정말 처음 봤어요. 울 것 같은 얼굴로. 처음 보는 여자애가 뒤에 서 있는데도,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장미를 그렸다니까요. 잎맥 하나하나, 가시 하나하나 안 놓치고. 그때 처음으로 자퇴를 한 걸 후회했어요. 돈을 아끼겠다고 영화관을 가 보지 않은 것, 시간이 없다고 서점에 가 보지도 않은 것이 아까웠어요. 나는 이런 사람들, 이런 그림들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사이) 내가 계속 불렀어요, 언니. 언니. 우리 처음 보는 사이인 거 아는데, 언니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언니 재능이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그렇게…….

소정    나를 응원하는 사람보다는 우리 엄마나 아빠를 더 곁에 뒀어야 했는데. 나를 천박한 멍청이로 보는 사람을 옆에 뒀어야, 

민서    나는 그 이후로 소정이 편이 되기로 했어요. 편이자, 팬. 

소정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민서    (종이 계속 접으며) 종이를 접으면서, 편지도 쓰고 하는 게 가능한가, 싶을 수 있는데, 제가 멀티가 조금 되거든요. 멀티 플레이. 아르바이트할 때도 카페 일할 때는 한쪽 손으로는 행주질하면서 한쪽 손으로는 오븐 온도 조절하기. 마라탕 집 일할 때는 카운터 보면서 주문 전화받기. 설거지하다가 문소리 들리면 총알같이 튀어 나가기.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이 한 명 더 들어온 거예요. 어디 대학에서 드럼 치는 애랬는데. 진짜 멀티가 안 되는 거예요. 손님 왔는데 계속 행주질에만 집중하는 거죠. 혼날 줄 알았는데, 안 혼났어. 사장님이 허허 웃으면서 그러는 거예요. 예술하는 애라 멀티가 안 되나? 하나에 집중해야 하니까. 아! 싶은 거예요. 아, 예술하는 멋있는 애들은 멀티가 안 되는 거구나…… 나는 멋은 없는데 멀티는 되는 거구 각자의 장단점이 있구나…… 그래서 소정이가 그때 나를 안 돌아봤던 거구나……  (보여주며) 봐 봐요. 이런 식으로, 벌써 완성. 장미.


사이.


민서는 장미를 티브이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새 종이를 꺼내 다시 무언가를 접기 시작한다. 

이전 04화 구와 마젠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