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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인 Nov 09. 2022

구와 마젠타

1부-4장

4장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소정, 편의점에서 산 삼천 원짜리 우산을 털고 문 앞에 선다. 


소정    나 왔어. 


대답 없다. 

소정,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민서를 발견한다. 
 소정, 놀라 민서 옆으로 간다. 


소정    무슨 일이야! 

민서    최선을 다했어. 돌아올 수 있는 강만 골라서 건넜고 징검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넜어.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았어, 사기 전에 라마즈 호흡을 했고 왜냐면 너무 들떠 있으면 안 되니까. 이런 게 다 마약 같은 거랬어. 수면 내시경 하는 것처럼 깰 수 있는 선에서만 하는 거랬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소정    민서야! 

민서    밤마다 꼬리를 자르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그리고 사라졌어…… 그래서 제때 팔지를 못한 거야…….

소정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민서야! 


 [상단에 주식 호가를 표기해둔 유튜브 스트리밍 화면이 송출되고 있다.]

[흰 와이셔츠(윗 단추를 두 개나 풀었다―)를 입은 남자가 빠른 속도로 말한다.] 


[여러분 저는요, 아직도 매일 아침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확인해요.]

[삼십 년 가까운 투자 기간 동안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반복했어요. 물론 이쯤 되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민서    내 실수야. 


 [근데 주식 투자할 때 이 고비는 무조건 넘겨야 돼요.]


소정    대체 얼마를 넣었는데 그래? 


 민서, 대답 없다. 


 [그래야 돈을 벌 수가 있어요.]


소정    오십만 원? 백만 원? 


 [그래야 성공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민서    육백만 원…….

소정    이 바보야! (잠시 말 없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줄게, 나중에. 꼭 만들어줄게. 

  취직하면 금방 버는 거야, 그거. 한 이 년 정도만 바짝 일하면 돼. 이 년 금방 간다? 

민서    의미 없어.

소정    없긴 왜 없어.

민서    네가 가야 돼, 유학. 그러려고 넣은 거야. 


 소정,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다. 


소정    왜?

민서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아는 것도 많으니까. 


 사이.


민서    그리고 더 알고 싶다니까…… 더 하고 싶다니까……. 


 민서, 비틀비틀 일어나서, 책상에 엎드린다. 


민서    가고 싶지? 너도…… 학원도, 유학도. 


 소정, 말없이 민서를 바라보고만 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만다. 


민서    미안해…… 내가 다 날려서.


 소정, 민서 맞은편에 엎드린다. 


민서    소정아.

소정    왜 불러.

민서    원래 이래? (사이) 네가 나보다 세 살 많잖아. 삼 년 후에도 이렇게 힘들어?

소정    아―니. 

민서    그래?

소정    나 힘들어 보여?


 사이.


소정    이 정돈 된다. 

민서    삼 년 뒤에…….

소정    그래, 삼 년 뒤엔. 


 화면에 글씨가 송출된다. 

[일주일 후]


두 사람,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민서의 핸드폰 소리. 
 민서가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낸다.


소정    왜?

민서    마라탕 집. 

소정    무슨 일인데?

민서    버릇 잘못 들었대. 근성도 없고. 

소정    우리 더러?

민서    나 더러. (사이) 그렇게 살지 말래. 

소정    나쁜 놈…….

민서    이번 달 월급은 못 준대. 대타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한테 줄 거래. 

소정    코딩 이야기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런 거 사실 하등 쓸모도 없거든…….

민서    맞아, 꿔바로우 안 줄 때부터……. 

소정    (사이) 누워 있는 거, 며칠 째지. 

민서    일주일…… 아마……. 

소정    비가 그치면 일어나려고 했는데. 

민서    장마가 왔나 봐. 

소정    하늘이 노했나 보지. 

민서    그 얘기 당분간 하지 마. 하늘 얘기 같은 거.

소정    왜?

민서    척지고 있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줬거든. 

소정    같이 울까? 울어줄까?

민서    울어서 해결되는 게 있을까?

소정    없을 것 같아. (사이) 울지 말자. 

민서    안 울면 또 하늘이 오해하면 어떻게 해? 이 정도는 감당할 만하다, 고 생각하면. 

소정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 장면을 보고도 오해할 수가 있나. 

민서    시퍼렇다는 이야기도 당분간 하지 말자. 

소정    미안해……. 

민서    어쨌든, 우는 건 에너지 낭비겠지?

소정    그래. 

민서 혼자 해결해 보려고 한 게 문제였어. 


 민서, 핸드폰을 확인한다. 


민서    도망가고 싶다. 


 사이.


민서    도망가고 싶다, 우주로. 소정아, 돈 많은 사람들은. 다 우주로 도망가고 싶어 하겠지? 지구가 

  없어지거나, 운석이 충돌하려고 하거나, 뭔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왔을 때……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오려고 할 때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데려갈까?

소정    안 데려가겠지. 

민서    난 코딩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너는 그림도 그릴 줄 알고. 

소정    그 정돈 테슬라도 그릴 수 있겠지. 

민서    테슬라가 그려? 걔가 누군데? 

소정    그래. 인공지능 자동차. 걔는 혼자 운전도 하잖아. 그림이라고 못 그리겠어? 


 민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민서    엘런 마스크!

소정    일론 머스크?

민서    그래, 그 사람!

소정    그 사람이 왜? 

민서    연락하자!

소정    그니까, 그 사람이 왜? 

민서    원래 우주를 노리는 사람이 진짜잖아. 왜냐하면 우주는 진짜 진짜 넓을 텐데. 거기에 진짜 진짜 

  돈을 많이 쏟아붓고 있는 거잖아. 무한한 공허에 돈을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부자라는 거잖아. 
  게다가 내가 얼굴을 아는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작게) 소박하고 소탈해 보였어. 


 [일론 머스크의 얼굴이 보이고 있다.]

[해맑게 웃으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


민서    정확하게 기억나. 마라탕을 포장하고 있었거든. 적당히 매운맛, 마유 조금, 청경채를 빼주시고, 

  빼주지 않으면 리뷰 평가 기대하고 있으라고 했고, 땅콩 소스 많이 달라고, 꿔바로우 큰 거 하나를 추가한 주문이었어. 그 주문을 포장하고 있는데 뉴스에서 나오더라니까, 자기 주식의…… 10퍼센트를 팔겠다? 아니지 팔겠다가 아니라 기부하겠다고……. 

소정    그런 말을 했어?

민서    그렇다니까. 내가 원래 뉴스 같은 거 안 듣는데. 그날은 귀에 딱 들어왔어.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 

소정    그래. 운명이 맞는다면, 대체 어떻게 연락할 건데?

민서    그걸,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 돼. 


 민서,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민서    SNS? SNS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진심을 잔뜩 담아서.

소정    (타이르듯) 민서야, 그 사람은 그런 메시지를 하루에 이십만 개도 넘게 받을 거야. 

민서    하지만 우린 진짜 진심이야! 

소정    그래, 너는 그렇겠지만, 알다시피 문자 메시지란 게…… (고민하다) 그래, 이건 마치 마라탕에서 

  벌레가 나왔을 때, 네가 문자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거야. 진심이지, 진심일 수 
  있는데,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 

민서    아…… 그러니까…… (헤아리듯) 내가 벌레…… 유학이 마라탕…… 손님이 엘런 머스크……. 

소정    (수정해준다) 일론 머스크.

민서    손님이 일론 머스크, 유학이 마라탕, 내가 벌레…… 아! 내가 벌레…… 내가 벌레구나!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소정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방법이 있을 거야. 합리적인 방법이. 


 민서, 소정의 어깨를 잡는다. 


민서    너 정말 유학 가고 싶은 거 확실하지! 정말이지! 세상이 두 쪽으로 갈라지더라도!

소정    난 (사이) 네가 불행하면 유학 안 가도 돼. 

민서    난 네가 유학 가야지만 행복해! 

소정    그런 게, 

민서    행복. 삼 년 후,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야. 

소정    (사이) 가고 싶어. 

민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화면에 영상이 송출된다. 
 [비행기가 날아오르다가 떨어지고 마는 모습]과 [머나시아 항공]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민서    (비장하게) 옛날에 봤는데, 미국에 도시 괴담이 있대. 라디오를 틀어놓고, 금니가 있는 사람이          식초를 잔뜩 머금고…… 전파가 흐르는 곳으로 가서 잘 조준만 하거든, 라디오에 접속할 수가 있다…… 우리의 진심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거야, 그것도 실시간으로. 

소정    (소리치듯) 너 그런 걸 믿어? 


 민서의 핸드폰 알림음이 계속 울리고 있다. 민서가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하자, 소정이 낚아챈다. 


소정    이제 핸드폰 같은 거 보지 마! 

민서    믿어. 

소정    응?

민서    믿는다. 삼 년 뒤에. 


 소정, 고민한다. 


소정    그래…… 하자. 해 보자고. 


 민서, 소정을 안아준다. 


민서    우리는 환상의 룸메이트야. 


 민서, 소정을 꽉 끌어안은 다음, 놓아준다.
 그리고 소정이 라디오를 숨겨둔 곳으로 가, 라디오를 꺼낸다. 


소정    거기에 라디오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민서    난 너에 대해서 모르는 거 없어. 


 소정,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만다. 

민서는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가 지지직거린다. 


민서    라디오, 준비. 금니 (입 안을 만져 보며) 준니(준비). 식초, (가져온다) 준비. 전파, 


 민서, 소정 동시에 위 올려다본다. 

구멍이 뚫린 천장을 올려다본다. 


민서    전파 준비. 준비 만땅. 

 
 민서가 라디오를 옆구리에 끼고 식초를 주머니에 넣는다. 

두 사람, 티브이를 딛고 올라선다. 
 소정의 어깨 위로 올라가는 민서. 


민서    코딩 배울까 봐. 정말 배워둔 건 다 쓸데가 있네. 공중곡예도 이렇게…….


 민서, 잠시 기우뚱하지만 집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엔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 구멍까지 완전히 닿기에는 부족하다. 


소정    안 닿을 것 같아! 좀 짧지? 우리 이제, 

민서    소정아, 내가 영 하면, 차 해! 영!

소정    어?

민서    차! 하라고!

소정    차!

민서    영!

소정    차! 


소정이 차! 하면서 발끝을 뻗어 올리면 민서, 아슬아슬하게 천장 구멍 쪽에 닿는다. 


민서    올랐다! 드디어 올랐어!


 민서, 주머니에서 식초를 꺼내 입에 잔뜩 머금고, 또 삼킨다. 

그리고 금니를 드러내기 위해 입을 벌린다. 

라디오는 계속 지지직거리고 있다. 

민서는 라디오를 위로 치켜든다. 

소정 위에 민서가, 민서 위에 라디오가. 
 

라디오 소리 [오늘은 2021년 7월 24일입니다. 신이 공 굴리듯 비가 오고 있네요. 빗길로 서부간선도로            정체가 예상되오니 출근하시는 분들은…]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린다. 

번개도 치고 있다. 

민서에게 짜릿짜릿하고 미세한 전기들이 느껴진다. 


 라디오 소리 [밝고 활기찬 아침이죠. 날씨만큼이나 다정한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네, 그렇죠. 또             이렇게 상품이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맞아요, 김치냉장고, 백화점 상품권, 그리고 날씨만큼이나 다정한 목욕 시간을 만들어줄 스페셜 샴푸 세트가 또 이렇게,] 


민서    으아아아아아악.

소정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려오자. 

민서    괜쟈나― 괜쟈나―! 계속해! 


 [화면에 보이는 라디오 영상이 들어온다. 꿈을 포기한 사람들.] 


소정,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나오자 당황한다. 


 [오늘은 사연을 보내주신 김진섭 씨에게 위로와 애탄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할까 하는데요. 유미 주의자로 유명한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썼던 편지를 일부분 인용하겠습니다. 신들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지. 천재적인 재능과 저명한 이름, 높은 사회적 지위, 빛나는 재기, 지적인 대담함 모두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죠. 신은 우리에게는 어떤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김진섭 씨, 포기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으셨나요? 그렇다면 기쁘겠습니다.]

[라디오 DJ, 민서와 소정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소정, 민서 씨도요?]

 
 천둥 번개가 친다. 

잠시 번쩍― 하는 무대.
 
 모든 화면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일론 머스크, 

우주, 

비행기 시승식, 

소정이 그린 것 같은 그림(너무 짧고 빠르게 돌아가 알아볼 수는 없다) 

   등등이 반복되다가 끊긴다. 
 
 두 사람, 그대로 떨어져 내린다. 


소정    아파. 

민서    아프…….

소정    바보야. 

민서    나 바본가 봐. 


 두 사람, 기절한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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