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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인 Nov 15. 2022

구와 마젠타

3부-6장

6장


두 사람, 같은 위치에 앉아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전과 똑같다.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이 뒤에 수십 개의 파란색 X자들을 표시해놨다는 것이다. 

그것 빼고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시끄러운 소리는 두 사람의 대화 도중, 정말로 시도 때도 없이 들릴 것이다.  


소정    몇 시지. 

민서    여섯 시, 십 분 전. 

소정    우체부는 몇 시까지 일하더라.

민서    여섯 시까지.

소정    왔어?

민서    아니. 

소정    답장이? 우체부가?

민서    우체부가. 그러니까, 둘 다 안 온 거지, 아직. 

소정    그럴 줄 알았어. 


두 사람, 기대 눕는다. 

긴 한숨을 쉬며. 


민서    어제는 옆 동네에 있는 마트에 다녀오다가, 우체부 아저씨를 마주쳤거든? 편지 온 거 있는지 물어보려고 막 뛰어갔는데 나를 위아래로 조금 훑어보면서 그러는 거야. (흉내 내며) 민서 씨. 민서 씨, 맞죠? 외람된 말씀인 거 아는데, 저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오고 싶지 않아요. 

소정    (기다리다) 그게 다야?

민서    (흉내 내며)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소정    무슨 뜻인데 그게?

민서    우리가 여기서 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소정    말도 안 돼. 

민서    그게 다였어. 

소정    그 사람이 뭔데 그런 말을 해? 

민서    싫다는 거지. 고작 우리 때문에 이 동네를 와야 하는 게…….

소정    사명이 없네. 우체부는 아무리 험난하고 지루하고 지난한 동네더라도 묵묵히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은 간절한 것도 없대? 그런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사람이 편지를 배달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런 사람이 편지같이 소중한 걸 배달한다는 게. 

민서    원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것 투성이잖아. 


 사이.


민서    고통은 하나의 아주 긴 순간…….

소정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민서    어쩌다 알았어. (사이) 너, 오스카 와일드 알아?

소정    알지.

민서    유명한 사람이야?

소정    그럴걸. 그, 동화 있잖아. 『행복한 왕자』 그것도 그 사람이 쓴 거야.

민서    『행복한 왕자』?

소정    왜, 있잖아. 외로운 새랑 왕자 동상 나오는 이야기. 

민서    아, 그러다 결혼하는?

소정    아니. 그거 말고. 새랑 왕자가 상부상조해 보려다 서로 사랑해버려서 망하게 되는 이야기 있잖아. 어릴 때 많이 읽는 거. 

민서    사람들은 어릴 때 그런 걸 읽는구나. 

소정    어차피 크고 나면 잊고 살게 되니까, 의미 없어. 

민서    어쨌든 유명한 사람이 맞나 보네…… (짧은 사이) 그 사람도 유학파일까? 

소정    아마 그렇지 않을까. 

민서    재수 없다. 

소정    그런 편이지.

민서    (고민하다) 그러면 너는, 제일 필요한 게 뭐야? 

소정    글쎄…… 집이랑, 생활비랑. 

민서    그런 거 말고. 누군가 딱 하나만 너에게 선물해준다면 말이야. 

소정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누가 대가 없이 뭔가를 준다는 생각. (사이) 너 빼고는.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 

민서    기쁘다. 사실 슬퍼…….

소정    그럼 너는? 딱 하나만 선물 받을 수 있다면. 뭘 해달라고 할 거야?

민서    난, 우주에 보내달라고 할 거야. 

소정    왜?

민서    우주에는 빅뱅이라는 게 있잖아. 다 빨아들이는. 

소정    블랙홀?

민서    응. 그거. 거의 비슷했는데…… 아깝다. 아무튼, 블랙홀에 들어가면 시간 같은 게 상관없어진대. 먼 미래도 갈 수 있고, 과거로 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거기로 빨려 들어가선 과거로, 과거로 가버릴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라던가. 

소정    왜 하필 그때야?

민서    그때가 너무 좋아서. 

소정    (짧은 사이) 바보. 

민서    나 바보 아닌데. 

소정    원래 바보들은 자기가 바보인 걸 모르는 거야. 


 사이.


민서    소정아. 너, 유학 가면 꼭 비엔나소시지 먹어. 

소정    왜?

민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갈 거잖아…… 칼집도 내달라고 해, 예쁘게……. 


소정, 대답 없다. 


민서    소정아.

소정    왜 불러.

민서    우리, 같이 호프집에서 일할래? 소시지가 유명한 호프집인데. 주 삼 회 세 시간. 유학 가기 전까지만 같이 소시지 먹는 연습을 하는 거야. 

소정    (사이) 비엔나에 소시지 안 유명해. 그리고 그 비엔나는 그 비엔나 아니야. 

민서    그렇구나…… 그 비엔나가 그 비엔나가 아니었구나……. 


소정,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무언가를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민서    또 이상한 소리 들린다. 고소하겠다고 해 볼까?

소정    그러지 마. 

민서    너무 낮이고, 

소정    그래도 아마 안 멈출 거야. 

민서    소정아.

소정    왜 불러?

민서    그러면— 어때?

소정    뭐라고? 

민서    (더 크게) 혹시 부대찌개 집은 어때? 점심 제공이래. 


 소정, 대답 없다.


민서    유학 가면 물리도록 소시지만 먹어야 하니까……. 

소정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민서    한식을 미리 많이 먹어둘 수도 있고……. 


 소정,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창문을 열고 크게 소리친다.


소정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우리 안 보여? 
 

소정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들은 들려온다. 

소정, 다시 거세게 창문을 닫는다. 민서가 작게 기침한다. 


소정    봤지? 소용없는 거. 


 사이. 


소정    나 그림 그리지 마?

민서    무슨 말이야, 그게. 

소정    너 변했다. 

민서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소정    예전 같으면, (사이) 아니야, 미안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람 같은 게 어디 있겠어.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세상도 변해. 


소정, 다시 자리에 앉는다.


소정    민서야.

민서    응.

소정    조만간 나가게 되면, 흰색 유화 물감 튜브 하나만 사다 주라. 퍼머넌트 화이트로.

민서    퍼머넌트 화이트……. 

소정    그래, 그걸로. 

민서    소정아. 난 한 번도 널 믿지 않은 적이 없어. 

소정    내가 그 말을 믿었으면 좋겠어?

민서    사실이니까. 


사이.


민서    소정아. 물감, 언제까지 필요해?

소정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민서    그러면 얼마나 기다릴 수 있어?

소정    기다리기가 싫어. 

민서    (사이) 그러면, 훔쳐 오는 것도 괜찮아? 


소정, 아무 말 없이 민서를 바라본다. 

민서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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