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량으로 운동하는 세계를 설명한 뉴턴의 이야기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뉴턴이 잠들어 있다. 그곳에 아래와 같이 그를 칭송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 기사 아이작 뉴턴이 잠들다.
그는 거의 신적이라 할 정신의 힘과,
자신만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행성들의 궤도와 모양,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석,
빛의 여러 빛살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이전의 그 어떤 학자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 빛으로부터 생겨나는 색의 성질을 탐구하였다.
자연과 고대, 그리고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그는 근면하고, 통찰력 있으며, 진실하였다.
그의 철학을 통해 그는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냈으며,
그의 품행 속에는 복음의 단순함이 깃들어 있었다.
인간들이여, 기뻐하라.
이토록 위대한 인류의 영광이 존재했음을.”
이토록 위대한 인류의 영광은 뉴턴이 정의한 단 한 가지 개념 — ‘질량’에서 시작되었다.
질량(Mass)은 단순히 무게(Weight)가 아니다.
질량은 물체의 본질적인 양, 힘에 저항하는 정도이고, 무게는 질량을 가진 물체에 중력이 가해진 힘의 크기를 말한다.
우리의 직관은 질량과 무게가 다른 것인가?라는 묻기에 헷갈리고 이것이 우리의 중고등학교시절을 괴롭힌 물리의 망령이다.
질량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뉴턴 이전에 없던 질문이었다.
근대 과학의 기반을 닦았던 갈릴레오 역시 운동의 성질에만 전념했지 운동을 정의하기 위해 질량이 먼저 정의되어야 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지동설만으로도 세상과 싸우기 벅찬 시대를 살았다.
뉴턴은 물체의 운동에 대해 집착했고 의문을 품었다.
왜 물체마다 같은 힘을 줬는데 움직이는 속도가 다를 것일까?
우리가 물체를 밀 때 느끼는 ‘버티는 힘’, 그게 바로 질량이다.
뉴턴은 그 버팀의 성질에 이름을 붙였다. 그는 그것을 ‘질량’이라 불렀다.
물체의 크기나 무게보다 더 깊은 곳에서, 움직이려는 세상에 저항하는 힘의 본질을 본 것이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무거운 것은 본질적으로 ‘떨어지는 성질’을 가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뉴턴은 세상을 이렇게 다시 썼다. 물체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려면 누군가 밀어야 한다. 그리고 그 미는 힘에 저항하는 정도 — 그것이 질량이다.
힘과 가속도의 사이에 숨어 있던, 세계의 저항 계수. 바로 저항 계수가 질량이다.
질량을 개념화한 것은 과학사의 전례가 없는 사유의 도약이었다.
뉴턴 이전의 어떤 과학자와 철학자도 질량을 개념화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가 느끼지 못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우주의 운동을 정립한 뉴턴은, 그 법칙을 세우려는 순간 뜻밖의 벽을 마주했다.
바로 그 운동의 주체인 ‘물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물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크기로 정의할 것인가? 밀도로 정의할 것인가?
물체마다 미는 힘에 저항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생각해 냈던 뉴턴은 힘의 방정식을 F=ma로 정의하였다.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라고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우는 그 운동방정식이다.
운동이란 결국 질량이 세계와 마주치는 순간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바로 운동에 저항하는 성질. 그것을 관성이라고 부른다. 관성이 바로 질량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질량을 정의하던 순간, 사과는 단순히 떨어지는 열매가 아니었다.
그것은 운동의 법칙이 드러나는 하나의 문장이었다. 질량은 이제 물체의 무게가 아니라, 우주가 변화에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하지만 뉴턴의 질량은 운동방정식에서 멈췄다.
그는 질량이 ‘왜’ 힘에 저항하는지를 끝내 밝히지 못했다.
질량은 물체의 속성처럼 보였지만, 그 본질은 불분명했다.
왜 어떤 물체는 쉽게 밀리고, 어떤 물체는 버티는가?
그 이유를 뉴턴은 ‘그저 그렇다’고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17세기의 뉴턴은 원자를 볼 수 없었고, 에너지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살았다.
세상은 여전히 신의 설계 아래 정지된 무대였다.
그는 그 무대 위에서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힘’, ‘가속도’, ‘질량’이라는 세 개의 축을 세웠다.
그의 질량은 완벽한 개념이었다 —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 위에서라면.
뉴턴의 우주는 단단한 무대였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유연한 무대로 바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농도, 세상에 응축된 에너지의 덩어리로 보았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물체의 질량이 늘어나는 현상,
즉 에너지의 양에 따라 질량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질량은 더 이상 저항의 상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에너지의 형체, 공간을 휘게 만드는 존재의 밀도였다.
양자역학이 등장하자, 질량은 또 한 번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전자와 쿼크, 그 작은 입자들 속에서 질량은 물질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field)과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나는 현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제 양자역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질량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질량은 물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질량의 개념화는 여전히 고마운 일이다.
그는 신의 손길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언어로 우주의 규칙을 써냈다.
그가 남긴 질량의 정의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대에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 즉 관성(inertia)을
처음으로 이름 붙인 시도였다.
그가 본 것은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 진실에 다가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고,
인류가 우주의 문턱을 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