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 찢긴 종이. 뒷 이야기를 새롭게 지어내 보세요. 그게 숙제였다.
꼬꼬마 시절, 나는 항상 궁금했다. 왜 악당들은 마지막에 그토록 힘을 못쓰는지. 무조건 져버리는 게 시시했다.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가 죽지 않고 화상을 입고 살아나 복수를 꿈꾸는 걸로 이야기를 각색했다. 잔혹동화가 따로 없었다. 마녀는 헨젤과 그레텔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헨젤과 그레텔과 닮은 다른 남매를 공격하게 된다. 그런데 결국 그것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마녀가 죽은 줄 알았던 헨젤과 그레텔까지 합세해 4:1로 싸우다 지친 마녀는 죽는다. 결국 권선징악에서 선이 악을 이기는 결말로 끝을 맺긴 하지만 악당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린시절 나는 이야기가 어떤식으로 흘러가든 결국 교훈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그때 당시 내가 읽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다 그런식이었으니까.
그러던 초등학교 때 교훈없는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 먹는다. 아무 교훈도 없는, 그럴듯하고 모범적인 결말로 끝맺는 이야기가 아닌, 그냥 아무 교훈도 없지만 시시하지는 않은 이야기를 써보자고. 그렇게 처음 소설을 썼던 것 같다.
길을 걷다 주인공이 오백원 짜리 하나를 떨어뜨린다. 그 동전이 우연히 어느 남학생의 발 밑에 들어가게 되고 주인공은 정중히 자기 동전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남학생은 싫다고 비아냥 대며 주인공을 조롱하고 둘이 철천지 원수가 되는 좌충우돌 학교 생활을 그린 이야기 였다. 유빈애라는 주인공 아이는 '골빈애'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물론 남학생이 지은 별명이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골빈애'라고 불리며 학교를 다니며 겪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렇게 철천지 원수처럼 지내다가 결국엔 로맨스(?)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남자아이는 주인공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500원짜리 동전이 자기 발 밑에 들어온 순간, 주인공이 니 발밑에 내 동전 좀, 이라고 말한 순간. 그에게 반했다는. 그래서 관심을 끌고 싶어 괴랄한 별명을 짓고 오히려 괴롭혔다는. 미운정도 정이라고 둘이 사귀거나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런 결말을 맺지 않았다. 너는 무심코 한 행동에 나는 상처받았다. 그러면서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남자 주인공은 마음을 접는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은 상당히 무자비하고 폭력적이고 무식한데, 여기서 차마 밝힐 수가 없다...................(나는 이 흑역사 속에서 잠들다. RIP.)
나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귀여니를 동경했던 걸까? 딱히 그렇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나는 순정만화라면 한 권도 채 못 읽고 책을 덮어 버리고, 인터넷 소설이라면 스크롤을 내리며 1, 2화 까지 겨우 읽다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그런 부류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뭔 말도 안되고 재미도 없는데 그땐 뭔 글을 그리 많이 썼는지 책처럼 생긴 수첩을 한 권 사서 그걸 빼곡하게 채웠다. 근데 어이없게도 그게 인기를 끌어서 반 애들이 그걸 읽으려고 자기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읽는 순서를 정했다. 나는 그게 퍽 작가 행새를 하는 기분이 들어 중학교 때도 그 일을 이어 나갔다. 그때는 좀 더 발전해서 수첩에 손글씨를 쓰는 대신 컴퓨터로 써서 인쇄해 쫄대 파일에 넣은 비교적 원고스러운(?) 형태였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 10분동안 그 이야기를 후루룩 읽었다. 쫄대 화일 앞에 포스트잇을 붙여 1교시 누구, 2교시 누구, 3교시 누구……이런 식으로 열심히 순서를 정해 써붙였다.
하루가 지나면 빳빳했던 파일 속 종이가 조금은 너덜너덜해져 돌아왔다. 친구들이 댓글을 다는 것처럼 연필로 감상평을 쓰기도 했고, 오타를 수정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집에서 그 다음 이야기를 써서 다음 날 학교에 가지고 가는 것이다. 방구석 작가 탄생의 순간이었다.
한 번은 고전소설 김시습의 '금오신화'의 5작품 중 한 작품을 선정해 각색하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만복사저포기'를 선택했다. 로맨스에 집중하다기 보다는 '귀신'에 초점을 맞춰 소설을 각색하다 보니 어느새 호러물이 되어 있었다. 로맨스의 비중은 20% 정도고 80%가 서스펜스였다. 그런데 그걸 발표하는데 반응이 엄청 좋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야기에 꼭 교훈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구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구나. 심지어, 교훈없는 이야기가 더 인기가 많구나!
요즈음도 가끔 글을 쓰다가 교훈 없이 마무리 되거나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끝맺으면 왠지 모를 찝찝함이 들곤 한다. 근데 그걸 최대한 견디려고 한다. 반드시 결말이 교훈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교훈적인 이야기는 뭐랄까, 아무래도 안정적이다. 자, 결말 마무리이~ 짝짝짝. 이런 느낌? 근데 그럼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글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늘 좋고 모범적인 쪽으로만 일이 풀릴 수 있겠는가. 이야기는 인생을 담고, 인생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인 것을.
그러니 이제는 합법적(?)으로 좀 더 과감하고 대범하게 교훈없는 이야기를 써내려 가도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