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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픈 감동

by 이재이



시집에 무심코 줄을 긋다가 문득, 너무 헤프게 줄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소한 문장에도 죄다 감동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지. 근데 좋은 걸 어떡해, 너무 좋은 걸 어떡해. 나이 들수록 모든 표현이 그냥 스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감동이 밀려오면 감동하는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다. 그건 일종의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 같은 거라서 그저 휩쓸리고 겪어내는 수밖엔 없다.



내 시집은 갈수록 너덜너덜해진다.






일에 치여 지낼 때 읽었던 시집에는 접힌 페이지가 기껏해야 한두 페이지 남짓, 줄을 친 문장들도 다섯

문장 내외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는 사소한 계절의 변화에 새삼스레 감탄하고(아니, 애초에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었는지도. 어, 봄이 왔나? 하면 여름이 이미 문턱 끝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으니) 별 거 아닌 표현에 와, 하고 내적 비명을 내지르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목과 어깨 근육이 뭉치고 굳어 버리듯 나라는 사람 자체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시기랄까.


그때 읽었던 시집을 뒤적이면, 아니 이런 문장을 어떻게 줄을 안 치고 버텼지! 이 문장 읽은 거 맞나? 싶은 표현이 수두룩 빽빽했다. 아이참, 아휴아휴, 연신 과거의 나를 책망하며 스태들러 연필을 빠르게 움직이는 나를 보면서 그때보다 지금 확실히 물렁한 상태가 됐구나 하고 느낀다.


차갑게 얼어있던 내가 어느 정도 온도를 회복하고 녹아있구나, 하는 감각.


찌르면 피 한방을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찌르면 두부처럼 푹 들어가 버릴 것 같은 사람이 되어있는 지금의 내 상태가 나는 만족스럽다.






'온화하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오늘 날씨가 좋네. 라는 말 대신에 오늘 날씨가 참 온화하네. 하고 굳이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편이다. '溫和'라는 단어에는 '날씨가 맑고 따뜻하며 바람이 부드럽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맑고 따뜻하고 바람이 부드러운 상태라니, 생각만 해도 간질간질한 마음을 안고 당장 산책을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좋다.


온화한 날씨처럼 나도 언제나 '온화한' 상태이고 싶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적당히 따뜻하고 꽉 막혀 있지 않고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정도의 틈이 있는 사람. 맑고 순수한 사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시집의 문장들을 꼭꼭 씹어 먹는다. 나라는 사람의 기상청에 '온화함'이라는 일기예보를 띄우기 위해서.


몰캉몰캉한 마음을 다치지 않게 조심히 다룬다. 시집을 읽으면서 울고 웃는다. 밑줄로 난도질 된 시집을 보면서 나는 묘한 희열을 느낀다. 한껏 헤프게 감정을 펑펑 쓴다. 이런 사소한 감동의 순간이 좀 더 자주 나를 찾아오길. 매 순간 좀 더 헤프게 감동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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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