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원의 서쪽 May 30. 2023

32살에 배우는 ABC

독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기



"저 독일로 이사 가요."


그렇게 말하고 정말 우리는 2달 만에 독일로 이사를 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전세금을 뺀 돈으로는 나의 학자금대출을 모두 상환해 버렸고, 독일로 선박택배를 보내고 나니 얼마 없는 현금으로 일단 와버렸다. 집도 못 구해서 2주짜리 아파트형 호텔에서 묵으며 이민가방을 옷장삼아 지냈다. 독일인도 구하기 힘들다는 독일 집 구하기를 위해 매일매일 부동산 사이트를 뒤적이고 찾아다녔다. 그래도 집을 못 구해서 우리는 최저가 호텔로 짐을 옮기고 아주 작은 방에 침대만 놔도 꽉 차는 방에서 1주일을 더 살았다.


그래도 남편은 왠지 신이 나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왜 그동안 그렇게 어렵고 힘들다고 말을 하지 않은 건지 답답했다. 아니 어쩌면 나도 알고 있었는데도 그냥 모른 척 한 시간이 길어졌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회사도, 집도, 언어도, 삶도.


남편은 독일에 온 지 3주 만에 첫 출근을 시작했고, 나는 남편의 출근일에 맞춰 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학원에 가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이유로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첫 수업날 우리는 A, B, C부터 배우며 독일식 알파벳을 따라 읽었다. 말도안되는 발음의 독일어로 책에 나온것을 이용해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는 32살입니다.

나는 결혼했습니다.

나의 남편은 여기에서 일합니다.

나는 독일에서 주부입니다.


이게 나의 자기소개가 되었다. 별게 다. 왜인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취미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어쩐 일인지 한국에서 하던 일을 독일에서도 내 직업이라고 말하기가 애매해져 버렸다. 그리고 한 반에 12명이나 있는데 30대인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2명밖에 없었다. 하긴 내 나이에 여기 와서 ABC부터 배우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다들 해외로 이주를 하려면 어느 정도 언어 공부를 하고 언어 자격증을 따고 나온다는데, 우리는 2달 만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했고 그래서 아는 독일어라고는 구텐탁만 배운 체로 와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독일에 왜 왔습니까?"


"나의 남편이 독일에서 일합니다. 나는 그와 함께 왔습니다."


"당신은 독일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나는 독일에서 주부입니다. 현재 나는 직업이 없습니다. 나는 독일어를 배웁니다."


몇 개월간 이게 나의 기본 소개가 되었다. 다들 의아해했다.

남편 회사 이직때문에 같이 이주했다고? 독일까지? 너의 삶도 있잖아! 너의 직업은? 너의 커리어는? 너의 한국에서의 직업은 독일에서 흔한 직업이 아닌데? 너 남편이랑 이혼하면 여기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럼 한국에 돌아갈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사실 뭐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이해가 안될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나의 직업과 경력을 포기하고 남편만을 위해 말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ABC부터 배우고 있으니...


하지만 너네가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을 같이 살기로 결심한 남자가 독일로 이직하게 되었을 때의 얼굴을 봤다면 이런 말은 못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엔 어려우니 그냥 "어... 맞아ㅎㅎ 이제 다시 찾아봐야지ㅎㅎ"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쉽게 이사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이민자의 삶이므로 여기서의 삶을 꾸려가야 했다. 언어도 안되고 삶의 방식도 다르지만 이민자답게 이곳에서의 삶에 맞춰 살아가야지. 그리고 이곳에서의 현실은 실제로 그러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독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100명 중에 99명은 "너무 부럽다" 였지만 사실 유럽사회에서 아시안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꽤나 정리되지 않은 산문 같은 삶이었다. 인스타에 올라온 나의 삶은 따사로운 햇빛을 느끼며 커피 한잔 하는 여유로운 유러피안 같은 시적인 모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종차별에 맞서 겨우 커피주문을 마치고 누가 내 휴대폰을 훔쳐가지는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구구절절한 에세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기로 했다. 이민자라는 타이틀 꽤나 멋지잖아?라는 생각으로 독일에서의 삶을 한껏 즐겨보기로!



작가의 이전글 독일로 이사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