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주황한 당근빛 케이크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다. 소풍날에는 김밥, 생일날에는 케이크, 추석에는 송편.
지금은 명절 음식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에는 어린 날의 추억과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드라마는 대사가 좋고, 어떤 드라마는 등장인물 간 관계설정이 좋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훌륭한 드라마, 드라마 OST에 설렌 드라마 등 이유는 참 다양하다.
<응답하라 1988>은 현실적인 배경묘사와 그 시대를 표현하는 세밀한 소품들이 좋았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만화잡지, 흘러나오는 뉴스 한 토막, 가요 한 소절, 그 시간에 유행했던 옷, 시계, 가구. 20세기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21세기의 나에겐 완벽한 재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때때로 출연(!)하는 생일케이크였다. 주인공 덕선이가 너무도 좋아하는 케이크. 나는 그 시절 덕선이보다는 한참이나 어린아이였고, 덕선이처럼 천연덕스럽지 못한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케이크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덕선이 못지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덕선'이는 언니 '보라'와 동생 '노을'이 사이에서 제대로 된 챙김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는 둘째로 나온다. 언니와 생일이 고작 3일 차이라는 이유로 언니 생일 파티에 묻어가야 하는 아이. 그래서 덕선이는 생일케이크에 집착한다. 드라마에서는 덕선이 아버지가 미안함을 표현하며 덕선이에게 생일 케이크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케이크를 받아 들고 기뻐하는 덕선이. 이 밖의 장면에도 케이크는 가끔씩 등장하는데 특별히 슬픈 내용도 아님에도 드라마에서 옛날 모습의 케이크가 등장할 때마다 그리운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설레고 반가우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옛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짝 슬픈 감정이 든다. 지금의 화려한 케이크에 비하면 투박한 모양새의 버터크림 케이크이지만 당시에는 생일날이 아니면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케이크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분홍 꽃장식도 기억 속 그대로다.
우리 가족 생일엔 아빠가 케이크를 챙겨주셨다. 언니 생일에는 하얀색 케이크,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의 생일에는 진한 갈색 케이크를 준비해 주셨다. 지금과 같은 부드러운 생크림 케이크가 없던 시절, 묵직하고 느끼해서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 최고의 순간을 선물해 준 녀석이다. 당시에는 케이크 색깔도 두 가지뿐이던 시절이라 진한 갈색 크림이 올라간 케이크가 내 눈에는 왜 그렇게 예뻐 보이던지. 초콜릿 색감이었지만 정작 초콜릿 맛과는 거리가 먼 맛이었다는 것은 비밀이다.
그러던 어느 해 엄마 생일날, 아빠가 아주 특별한 케이크를 사 오셨다. 진한 주황색으로 물든 케이크였다.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원색의 케이크다. 아빠는 신기해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흐뭇해하셨다. 제과점 아저씨도 처음 만들어 본 케이크라고 하셨다며 그런 케이크를 준비한 당신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시는 아빠. 케이크에 화려하게 올려진 데코레이션도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내 생일인 것처럼 감탄하면서 그 케이크를 좋아했고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마 주황색 케이크를 먹어 본 동네 1호이지 않을까? 이제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케이크. 감성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참 소중하고 감사한 추억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언니가 가족들 케이크를 준비할 만큼 성장하기 이전, 우리가 아이였을 때 정작 아빠 생일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는 것이다. 생일 파티를 했었는지, 생일 케이크는 누가 준비했었는지 기억이 없다. 어린 나에게는 나의 생일이 아니면 큰 관심사가 아니었을 테니 내 기억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나의 기억 속에만 잊힌 것이길... 그랬다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