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고 따라 쓴다. 손가락에서, 몸에서 나오는 글 쓰고 싶다
요즘 내 이름 앞에 붙어 나를 설명해주는 말 중 하나인 ‘작가’라는 말이 어색하다. ‘작가’라는 명사 앞에 ‘초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면 이 말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읽었던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문학동네에서 <소설가의 일> 산문집을 낸 이후 기자와 했던 인터뷰 글 내용은 이랬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美文) 쓰고 싶다면 미문(美文) 인생을 살자. 재능보다는 노력(...)근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해야 해요. 개인적인 이해만으로 부족하고 궁극적으로 통합된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큰 이야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2014.11.13. 동아일보, 박훈상 기자)는 말이었다.
‘글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서 나온다’ 했던가. 마음끝이 손끝에 닿아 일어서는 문장으로 일으키는(...) 글 근육 키우기,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함에 대한 다른 표현 이리라. 글 쓰는 습관 만들기 위해 최근 들어 관심분야 책을 읽고 책에 대해 내 방식대로 리뷰한 글을 브런치에 지속적으로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천 중이다, 북리뷰를 위해서는 눈에 띄는, 발견되는 문장에 밑줄 긑기, 문장 속 글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천천히 씹기, 이런 과정에서 내 생각이 정리되고 감각이 더해져 내 고유의 맛이 담긴 문장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시작한 북리뷰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상실의 시대>,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 <리듬분석>에 이어 4번째 책 <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책장을 넘기는 중이다. 책을 읽고 쓰다 보면 어딘가로 다다르겠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부제 :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옮긴이 홍철기, 펴낸 곳 도서출판 갈무리)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책의 덧 표지를 벗겨내고 읽으려 한다. 앞·뒤표지의 노란색 때문이다. 덧 표지는 탁한 진노랑색인 반면에 덧 표지를 벗겨낸 앞·뒤표지 그리고 책등은 밝은 느낌의 노란색이기 때문이다. 환화게 다가오는 봄 빛깔이다. 왠지 이 색 때문이라도 지치지 않고 책을 끝까지 볼 것 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판 저자 서문 끝부분에 저자가 한국어로 쓴 이름이 있다.
2009년 6월
브뤼노 라투르
이제부터 문장과의 만남 시작이다.
지금, 동시대, 현대인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라투르는 철학, 인류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지식인으로 현대 과학기술에 관한 인류학적이고 철학적인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라투르가 제기한 질문 즉 ‘우리가 근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이었나?’라는 의문을 저자는 과학적 입증의 공론장으로부터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 낸다.
중요한 문장들을 자판기를 두드리며 그대로 따라 쓴다.
p 40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적는다.
시간은 비가역적(非可逆的, 반대로 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이어서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 이 시간의 승부에서 근대는 승자이자 정복자이며 고대는 패자이다. 라투르가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비대칭적 이분법이다.
내 몸의 언어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다시 앞 뒤 내용적으로 근대성을 키워드로 맥락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필사(筆寫) 한다.
p138 과연 오존층 파괴나 지구온난화 혹은 산림파괴 문제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하이브리드를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인간 행위의 결과이기에 인간 영역에 속하는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자연 현상학적, 윤리적, 사회적, 환경적(...) 그 어느 측면에서 논의해야 할까?
(아래)
알렉산드로스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른다. 베르텔레미(1743-1811)의 1767년 작품 (위키백과 참고))
〔고르디 오스의 매듭(Gordian Knot)〕 :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 오스가 묶어놓은 매우 복잡한 매듭으로 그는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프리기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 버렸으며 결국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르디 오스의 매듭’은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고르디 오스의 매듭을 자른다’는 말은 복잡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라투르는 문제를 단순화하지 않고 복잡한 상태 그대로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고르디 오스의 매듭을 다시 묶는다’고 말한다. (p21, 22)
p139 이와 같이 예외적 경우들이 증식할 때, 즉 만물의 제3신분과 제3세계가 연합
(...) 이와 같은 예외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헌법의 공간이 아닌 새로운 공간의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 공간은 헌법상에는 비어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중간지대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80 근대인은 역사주의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간직하고 모든 날자를 기록하고자 한다.(...) 역사가들은 과거를 세부 묘사 하나하나에 공들여 정교하게 재구성하는데, 과거가 그들에게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진정으로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 과거는 남아 있고 심지어 회귀까지 한다.
라투르는 자연과 문화를 분할하지 않은 전통사회나 원시부족들이야말로 하이브리드의 연결망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분할하지 않는 현실의 접근법으로 인류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인류학자는 그들의 지식, 과학, 문화, 관습, 제례, 정치, 경제 등을 통합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p209 모든 것이 자연과 사회의 극단들 사이에서 갇혀있어야만 했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세계에서 역사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은 단순히 발견되거나 사회는 전개되거나 무엇이던 다른 것에 적용될 뿐이었다. 현상이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과의 조우에 불과했다. 우연적 역사란 것이 분명 존재하였지만 인간에게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자연적 사물들의 필연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우리가 설명의 화살의 화살의 방향을 뒤집자마자 (...) 비로소 역사가 실제로 가능하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 모든 본질들은 동일한 이유에서 사건이 된다. 역사는 더 이상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 자연 사물들의 역사가 된다.
문장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생각한다.
몇 해 전, 대학원 박사과정 다닐 당시 샀던 책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되는 문장이 그리 많지 않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페이지를 뛰어넘는다. 다른 때 다른 느낌으로 또다시 펼치면 된다. 아직도 나는 라투르의 세계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의문을 갖지 않고 당연하게 여겼던 역사적 시기의 분할, 인간과 비인간의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다시 연결해보기, 이분법에 기초한 분할, 편견을 무너뜨리고 다시 묶어서 통합적으로 생각해야겠다는 것은 내 삶의 통합적 인식의 지표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후 책의 뒤표지를 읽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이제 그것의 반생산적인 성격을 제거한 새로운 유형의 근대인을 추구하자’ 이 주장에 동의한다.
새로운 유형의 근대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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