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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온 Feb 19. 2024

캐리어 2개의 삶

진정한 자유

 언제였더라,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한창 유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독후감상문을 써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분명 열심히 책을 읽고 감상문도 열심히 써서 제출했지만 별 감흥도 없는, 그저 숙제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엄마의 밑에서 자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버리기가 힘들었다. 친구들에게서 받은 작은 쪽지 하나까지 보관해야만 하는 터라 방은 항상 어지럽고 더럽기만 했다. 방을 치우라는 엄마의 호통에 겨우겨우 정리라는 것을 해보지만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던 물건을 보기 좋게 나열해놓기만 했을 뿐,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물건은 버리지는 않는데 물욕이 넘쳐서 항상 무언가를 사고 모으기를 반복하다 보니 내 방을 넘어서 내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그렇게 물욕의 노예로 살다가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것에 대한 계기도 없었다. 그냥 이렇게 쓸모없는 물건 더미 속에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행동에 옮겼다.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들고 와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장에서부터 책장까지 소중한 것이 아니면 다 정리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나 상태가 아주 좋은 것들은 기부를 하거나 되팔았거나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도무지 남에게 양도할만한 상태가 아닌 것들을 쓰레기봉투로 직행했다. 내 방에서 나온 것들이 100리터 쓰레기봉투 11개를 꽉꽉 채웠다.


 그 이후로 빠르게 삶의 변화를 느꼈다. 그렇게 버리기 아깝고 힘들었던 것들을 정리하고 났더니 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분명 소중한 것이라며 고이고이 모셔둔 것들이었을 텐데 말이다. 방에 있으면 사방이 물건들로 둘러싸여 있어 항상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무언가를 봐도 더 이상 갖고 싶다는 충동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자유가 이런 기분이구나.




 지금까지 너무 많은 물건들에 매여있었다. 그 어떤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것이 어느 순간 '가져야만 하는 것으로 둔갑하게 되었을 때부터,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불필요한 것들을 인생에서 제거하고 났더니 그제야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


 필요 이상의 물건을 구입하고 소유하려는 이유는 그 물건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과시욕을 버리고 나면 그제야 정말로 필요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2017년 겨울, 배우자와 함께 한국을 떠 영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의 내 짐은 고작 캐리어 2개에 다 채울 수 있었다. 사계절 옷과 신발, 속옷과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모두 챙겼지만 모두 들어가고도 남았다. 영국으로 터전을 옮겨와서 불편함을 전혀 느낀 적이 없었으니 내 삶에 필요한 물건들은 딱 그 정도라는 말이다.


 엄마의 친구분 중에 수녀님이 계신데 그분은 작은 캐리어 하나에 모든 짐을 다 챙기실 수 있다고 하신다. 언젠가는 그분처럼 캐리어 하나에 내 모든 삶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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