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온 Feb 21. 2024

영국과의 작별

어느덧 3년

 전 세계를 판데믹의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에 하필이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어딜 가나 마스크로 호흡기를 가리고 평범하게 지나가던 일반인도 괜히 힐끗 쳐다보게 된다.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헛기침이라도 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따갑게 꽂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전 세계를 벌벌 떨게 만든 전염병이라곤 세계사나 역사 교과서에서나 봤었는데 현실에서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기업과 회사는 재택근무로 돌렸고 식재료를 사러 갈 때에도 통행증이 필요했다. 길거리엔 사람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원래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지만 그건 자발적 집순이일 때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나날이 커져갔다. 혹시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균을 옮길까봐 홀로 사시는 조부모님을 방문하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가족들도 있었고, 기관지가 약한 탓에 바깥 외출을 병적으로 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코로나19에 걸리는 날엔 마치 죄인과도 같은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그만큼 서로의 일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전염병이란 그런 것이었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국내여행조차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동안 대구에 확진자의 수가 급격하게 많아지자 대구를 봉쇄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그런 코로나19가 판을 치던 판데믹의 시기에 나와 남편은 강아지를 데리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비행기를 타기 48시간 전에 지정된 병원에서 코로나19 확진 테스트를 실시해 음성이 나와야만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차를 탄 채로 드라이브 쓰루 형식으로 확진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의료진들의 지치고 피곤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모두가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이 와중에, 본인도 무서울 텐데 사명감으로 저렇게 방호복을 입고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며 서 있는 그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모든 의료인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공항은 한산했다. 살면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공항은 처음이었다. 공항의 비행기 이착륙 전광판도 텅텅 비어있었다. 3년 전, 처음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로 가득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공항 내 좌석들도 안전거리 유지를 위해 중간중간에 방해물로 좌석을 막아두었다. 공항의 식당과 카페는 당연히 문을 닫았고 그나마 연 상점도 손님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떨어져 앉아 공항을 둘러보았다. 두꺼운 우주복과 같은 차림의 방호복과 방호 마스크를 낀 사람, 페이스 쉴드에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손에는 위생장갑을 낀 사람, 방역 마스크와 천 마스크를 겹쳐 착용한 사람 등등. 나와 남편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답답하더라도 방역 마스크를 착용했고, 혹시 모를 감염을 대비해서 최대한 음료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또 위생 장갑을 착용해서 무언가가 직접 우리의 피부에 닿는 것을 피했다. 이제 이렇게 살아가는 게 당연해진 것이다.


 우리의 3년은 판데믹의 시작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전 09화 빨간 벽돌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