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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온 Feb 19. 2024

이민자의 삶

영주권

 이번 글에서는 영국에서 살면서 가장은 아니지만 조금 많이 서러웠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분'에  대해서 한 번도 깊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국인이라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고, 어디를 여행할 때는 무비자로 여행을 할 수 있는 나라도 많고, 또 필요에 따라서 여행자 비자를 발급하는 것은 어렵지도 않아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이야기가 달랐다. 미국에 정착을 하려고 하니 그에 맞는 비자를 신청해야만 했다.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라고 느낀 것은 비자를 신청하면서였다. '세상에, 비자 종류가 이렇게나 많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비자의  종류가 나열되어 있는 표를 보면서 머리가 지끈해졌다. 이렇게 비자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이유로 비자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겠지? 그렇게 생각이 들자 조금 무서웠다. 미국의 이민국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모르고 추방당했다고 했는데, 나도 그러면 어떡하지?' 아직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불안해졌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굳이 상상해서 불안해하는 것이 내 특기인데, 필요 이상으로 몸을 사리고 겁이 많은 것은 이 쓸모없는 특기 때문이 아닐까 매번 생각한다.


 다양한 비자의 종류를 읽어보다가 머리가 아파져서 인터넷에 내가 신청해야 할 비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검색을 해보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비자를 신청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존경하면서 문명의 해택을 충분히 누렸다. 검색을 해보니 배우자 비자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배우자 비자도 종류가 여러 개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IR-1이라는 비자를 신청하면 되었다. IR-1 비자는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을 한 지 만 2년이 지난 사람이 신청할 수 있는 비자이고 유효기간이 10년인 영구 영주권이 발급된다. 참고로 배우자 비자에는 CR-1 비자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을 한 지 만 2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이 신청할 수 있는 비자인데 유효기간이 2년인 임시 영주권이 발급된다.


 배우자 비자를 신청하기 위한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청원서 제출, 패킷 3 수령, DS260 서류 작성, 신체검사, 인터뷰, 그리고 미국 본토에서 신청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미국 입국을 필수로 한다. 결혼으로 발급이 가능한 배우자 비자는 다른 비자들에 비해 절차도 방법도 굉장히 쉬운 편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비자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영주권을 위해 10년을 바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 홀로 타지에서 버티고 버틴 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지 생각하니 괜히 울컥했다. 나는 그 쉽다는 배우자 비자를 발급받는데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그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과연 헤아릴 수나 있을까.


 런던에 있는주영 미국 대사관에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나의 인터뷰를 담당한 영사관은 굉장히 차갑고 냉정했다. 영사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짜증이 난 표정으로 "아, 간단하게 말해 줄 수 없니?" 하며 말을 끊기도 했다. 물론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강압적인 태도에 괜히 작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입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시민권을 따지 않는 이상, 나는 이민국이 언제든지 추방할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 그 생각에 서러워졌다. '에라이, 더러워서 시민권을 따고 만다 내가.' 그때 그렇게 다짐했다.


  영주권이 배송이 되면 그 안에 Welcome to the United States라고 적힌 팸플릿이 함께 들어있다. 그 안에는 미국에서 정착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적혀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쉽게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이 영주권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영주권을 받아 기쁘기도 했지만, 마냥 기쁘지만도 않았다. 나는 정말 이민자의 신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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