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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온 Feb 19. 2024

3월의 런던

짧았던 여행을 돌아보며

 남편인 과 함께 런던에 3주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다. 영국 시골에서 사는 것도 평화롭고 좋았지만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의 생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빨간 2층 버스가 지나다니고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있고 튜브를 타고 다니는 런더너들의 생활을 직접 눈에 담아보고 싶었다. 1주는 아쉽고 2주는 애매해서 3주 동안 런던에 있기로 결정했다. 런던의 물가는 참으로 비싸다는 것을 호텔을 예약하면서부터 실감할 수 있었다.


 워털루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잡았다. 방에서 바로 런던아이와 빅벤이 보이는 뷰라 고민도 하지 않고 예약했다. 런던까지 가는 이동수단은 기차로 정했다. 우리가 사는 동네로부터 런던까지는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하고 총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영국의 기차에는 KTX처럼 가족석이 있는데 과 나는 그 좌석에 앉아 둘이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기차는 그 유명한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했다. 해리포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두근두근 할 킹스크로스 역! 기차가 정차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출입구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렸다. 얼른 나가서 구경하고 싶다!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총알이 튀어나가듯 달려 나갔는데 첫 감상은 '뭐야, 서울역이랑 비슷한데?'였다. 킹스크로스 끄트머리에 해리포터 스토어가 있고 그 유명한 벽을 뚫고 지나가는 짐수레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우리는 역을 나왔다. 역 앞에는 손님들을 위한 택시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깔끔했고 조용했다. 나보다 존이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숙소 바로 옆 건물에 폴란드 음식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 어머니는 폴란드계 미국인이셔서 그는 어릴 때부터 폴란드 음식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은 폴란드 음식점이 있다는 것에 한 번, 또 그 위치가 숙소 바로 옆이라는 것에서 두 번 기뻐했다.  런던에 도착한 그날 저녁 메뉴는 이미 그 시점에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폴란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설렜다. 가게 내부는 굉장히 깔끔했고 점원들은 친절했으며 오픈 주방으로 요리사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을 잠시 듣고 있었는데 영어가 아닌 폴란드어로 이야기를 했다. 요리사들이 전부 폴란드 사람인가 보다. 도 나도 음식에 대한 기대가 점점 높아졌다. 우리는 프로기(pireogi)와 굴라쉬(goulash)를 주문했다. 프로기는 만두나 라비올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맛도 비슷했다. 굴라쉬는 갈비찜과 같은 모양으로 고기는 매우 부드러웠고 양념이 아주 적절하게 배어있었다. 폴란드 맥주도 함께 주문을 했는데 그때 마신 맥주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처음 보는 맥주였고 발음하기도 힘들었는데 살면서 마셔본 맥주 중에 단연 최고로 맛있었다. 과 나는 런던에서 돌아온 후로 계속 그 맥주를 찾고 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딘가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꼭 마셔보세요


 3월의 런던은 추웠다. 아직 바람도 차가웠고 비도 추적추적 내려 축축했다. 우울한 하늘이 너무나도 영국스러운 그런 날씨였다.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여행을 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다는 걷는 것을 선호한다. 원래도 걷기를 좋아하지만 이런 여행지에서의 걷기는 참 새롭고 좋다. 아무리 걸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모든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가면 그때부터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와 문제지만. 새로운 길을 걸을 때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그것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반짝반짝 보이는데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이 너무 즐거워 꼭 걷기만 고집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길을 걷는데 지하에 작게 있는 티룸이 보였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홍차와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을 만날 수 있었던 그날의 마법을 아직 잊지 못한다.


 런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세인트 폴 대성당을 꼽겠다. 참고로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대성당에 들어가면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전망대가 너무나도 좋았다. 오래된 성당이니만큼 엘리베이터 같은 시스템이 없고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직접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조금 힘이 든다. 돌로 만들어진 계단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움푹 파여있었는데 그 자국을 보며 감동했다. 수 백 년도 전에 살았던 사람과 같은 계단을 사용하고 있다니. 이렇게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첫 번째 전망대가 보인다. 물론 여기서 구경하고 바로  내려가도 되겠지만, 우리는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두 번째 전망대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점점 가파르고 좁아졌다. 숨이 가빠오고 허벅지도 터질 것만 같았지만 묵묵히 발을 내디뎠다. 두 번째 전망대에 도착하자 시원한 바람이 위로를 하듯 우리를 반겼다. 이 높은 건물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사실도, 또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3주 동안 머문 런던에서의 식사는 대부분 폴란드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매번 다른 음식을 시켜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았지만 은 폴란드 소시지가 들어간 샌드위치만 계속 먹었다. 새로운 메뉴를 먹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도전을 즐기는 나와 익숙한 음식만 먹는 은  의외로 좋은 음식 친구이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그가 주문할, 맛이 보장이 된 안전한 음식이 있으니 얼마든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는 내가 주문한 메뉴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다음엔 그 메뉴를 주문하기도 한다. 처음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너지가 좋아서인지 이제는 서로가 어떤 음식을 주문하든 긍정적으로 지켜보는 편이다.


 3주간의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대영박물관이었다.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은 고흐의 해바라기. 수많은 유물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중 많은 것들은 약탈해서 가지고 온 것들이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조금 씁쓸해졌다. 영국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강대국이었는데, 식민지가 너무나도 많아서 지어진 별명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 나라들로부터 가지고 온 문화재들이 많았겠지. 그런 것들을 모아서 그 유명한 대영박물관을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참 역사란 슬픈 것이구나. 한참을 걸어 드디어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멀찌감치 볼 수밖에 없었는데 딱히 별 감흥은 없었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하도 유명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영박물관 1층에는 좋아하는 그림을 프린트해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고흐보다는 모네를 좋아해서 모네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프린트해서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예쁜 액자 안에서 그날의 추억을 담고 있는 그 그림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길던  짧던 여행의 끝자락에서 현실로 돌아갈 때면 괜히 울적해진다. 새로운 모험보다는 익숙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벌써부터 지루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얼른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3주 동안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면서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마음이 항상 붕 떠있어서 불안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내 감정이 어떤 모양인지조차 헤아리지 못했다. 현관문을 열면서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집에 도착했다는 편안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그제야 여행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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