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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온 Feb 18. 2024

쉼표의 힘

어쩌면 온점보다 더 중요한

 영국의 겨울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별로였다. 흐린 날만 계속되는 가운데, 비와 바람이 합쳐져 비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었다. 추적추적한 날씨에 외출을 하기 꺼려져 집 안에만 있다 보니 점점 우울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 집의 보일러가 마침 고장이 나서 집 안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도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영국에서의 찬란한 나날을 보내기를 기대했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외국인 남편을 따라 타지에서의 생활을 선택한 것은 나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서 불평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 선택으로 인한 모든 후폭풍을 감당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고 싶었다. 바쁘게 살던 한국에서의 삶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영국에서의 삶은 너무나 지루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게 없었다. 목표도 없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덩그러니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온전히 주어지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국에서의 삶이 오히려 편했다.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아서 그중에서 우선순위를 뽑아 차근차근해나가면 되었다. 취업을 위한 스터디도 해야 하고, 토익을 위한 공부도 필요하고, 자격증을 위해 학원도 다녀야 하는 삶이 너무 익숙했다. 반면 영국에서의 하루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할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스터디도, 토익도, 자격증 공부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꿨는데 막상 그 삶을 맞이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잠깐 게임을 하며 정신을 팔면 하루가 금방 흘러가버리곤 했다.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낸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지만 여전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뭘 해도 한국에서 느꼈던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가 없어 자괴감을 느끼던 중에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면 어떻까?' 하는 생각이 문득 샘솟았다. 그 짧은 찰나의 생각이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일을 하게 된 곳은 한 마트의 고객 서비스 센터였다. 과거, 사람들을 대하던 직종에서 종사했던 것을 알아본 매니저가 바로 나를 채용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많은 것을 알려준 곳이다.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은 모두 중년 이상의 연상의 분들이셨다. 다들 나를 막냇동생 혹은 딸 혹은 손녀처럼 여기고 잘 대해주셨다. 가장 좋아했던 동료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리처드 할아버지였는데 처음엔 차가운 말투로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행동이 참 따스한 분이어서 결국엔 좋아하게 되었다. 하루는 리처드 할아버지와 둘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나는 사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한국에서는 바쁘게 살았는데 여기 와서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보인다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어 고민이라고 있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리처드 할아버지는 한참을 가만히 생각을 하시더니 툭 말을 내뱉으셨다.


 "그렇구나. 네 고민이 뭔지 알겠다. 나는 말이야, 네가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단다. 고작 몇 년 느긋하게 산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아. 푹 쉬면서 미래를 위한 에너지를 비축해 두는, 충전하는 기간이라 생각해 보렴."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말인데 이상하게도 큰 위로로 다가왔다. 아직까지 가슴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은 내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하루를 허투루 보내는 것 같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니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빨랐던 걸음걸이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많이 느려져있었다. 항상 시간에 쫓겨 분 단위로 계획이 짜여있던 스케줄표에는 몇 개의 대략적인 할 일들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바쁘고 정신없이 무언가에 쫓겨 살던 내가 30분이고 1시간이고 저녁노을을 멍하게 바라보며 해가 완전히 지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쉬어갈 수도 있구나' 이제는 시간이 막연하게 많이 주어진다고 해도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


 한 문장에도 쉼표가 필요하듯, 우리의 인생에도 필요한 것은 어쩌면 쉼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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