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얘기하고 싶지 않을 때
매월 1일, 혹은 매월 은행 영업일 첫날이 되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은행 ARS로 엄마 통장의 잔고를 확인한다.
엄마가 사는 집 월세가 자동이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은 그게 제 날짜든 아니든 엄마가 월세관리를 하셨었다. 그러다 한 번씩 집주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떤 날은 월세가 밀렸다고, 어떤 날은 입금 날짜가 어떻다고, 또 다른 어떤 날은 어머니가 잘못 입금하셨다고.. 뭔가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엄마의 치명적인 단점을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은 그게 남에게 빌린 돈이든 내가 번 돈이든 다 내 돈으로 여긴다는 거다. 카드 한도는 쓰고 갚아야 하는 돈이 아니라 그냥 내 돈이라 여기시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빌린 돈을 제 때 안 갚아도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시고, 내야 할 세금이나 요금을 밀려놓고도 잊어버렸다고 속 편하게 말씀하셨었다. 카드값을 못 메꿔 대신 내 드리거나 보태드린 적도 여러 번이다. 돈이 늘 별로 없으니 펑펑 쓰지는 못 하지만, 지금 주머니(통장)에 있는 돈은 부담 없이 쓰신다. 분명히 며칠 후면 이런저런 이유로 써야 하는 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정 급하면 쓰시라고 드린 내 신용카드도 자잘하지만 많이 쓰셔서 남편 보기 민망했던 적이 많다.
집주인 내외가 아무리 마음씨가 좋은 분들이어도 받아야 할 돈을 못 받고 있으면 신경 쓰이고 불편했을 거다. 그러니 말을 알아듣고 해결할 수 있는 내게 연락하시는 거였겠지.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엄마를 모시고 은행에 가 자동이체 신청을 해 버렸다. 자꾸 잊어버렸다고 하시니 그렇게 한 거였는데, 어쩌면 엄마는 잊어버리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25일에 노령연금이니 뭐니 엄마의 한 달 생활비가 입금이 되면 매월 1일이 되기 전에 찾아 놓는다. 그래서 1일에 잔고 확인을 해 보면 월세보다 적은 금액이 남아있다. 나는 매월 1일 아침에 잔고를 확인하고 부족한 금액을 채워 놓고. 나도 없는 살림에 그렇게 채워 놓고 나면 남편 보기도 미안하고 허탈하고 기분이 안 좋다. 매달 반복되는 일인데도 무뎌지지 않는다.
며칠 전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월세를 보내려고 하는데 계좌번호가 없어. “
“음.. 엄마 돈 있으세요?”
“없지. ## 은행에 조금 있나 확인해 보고 보내려고. “
“.............”
벌써 한참 전에 ##은행에 내가 넣어 드렸던 것은 진작에 다 찾아 쓴 걸 알고 있는 나는 말을 이어가기 전에 한숨부터 쉬었다.
엄마가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내 물음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핑계를 대시는 거다. 아니 이젠 핑계도 아니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다. 그냥 아무 말이나.
“제가 자동이체 걸어놨다고 했잖아요. 잔고 확인해 보니 부족해서 제가 채워놨고 그래서 제 날짜에 인출되었어요. 그리고 오늘이 며칠인데 이제 와서”
“어유, 너도 힘든데 매번 미안해서 어쩌니. 엄마 살린다고 생각해.”
“저 출근해요. 나중에 통화해요.”
아직 출근시각이 조금 남았지만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아무 말 대잔치가, 돈 얘기만 나오면 정말이지 성의도 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미안하다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을 길게 들으면 내 속은 주체할 수 없이 부글거릴걸 알기에 그렇게 그냥 전화를 끊은 거다.
남편이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다.
“너 혼자 그러지 말고, 오빠와 상의해서 매 달 얼마씩 보내는 게 어때?”
“싫어. 엄마손에 있으면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려. 차라리 필요하다고 말씀하실 때 필요한 만큼만 드리는 게 나아.”
대학 다닐 때, 방학마다 알바를 했었는데 엄마는 내가 월급을 받으면 급한 일이 있다며 번번이 빌려 달라 했었다. 그래서 나중에 돌려받았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한테 돈을 드리고 부글거리는 속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정말이지 엄마와 돈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