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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옆집 모녀와 우리 모녀

by 모래올

몇 년 전 율마 두 그루를 사 온 적이 있었다.

키우는 환경은 이렇게, 물은 이만큼씩, 환기는 그렇게...

화분에 심긴 적당한 크기의 율마 두 그루를 가져와 사장님이 일러주신 대로 그렇게 신경 써 보살폈다. 처음 얼마동안은 말이다. 그러다 물 주는 주기도 내 마음대로, 해와 바람은 그냥 그렇게 늘 그 자리에, 너무 추우면 여기 조금 따뜻해지면 저기로 옮겨주며 보살핀다기보다 율마 스스로 살아내고 있었다. 더디지만 조금씩 자랐고, 초록잎 짙어졌다 옅어졌다 하면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하나는 여전한데 하나는 점점 초록잎이 갈색이 되어 갔다. 두 화분을 똑같이 보살피니까 목이 마르면 똑같이 마를 테고, 추우면 똑같이 추운 걸 텐데 하나는 괜찮고 하나는 갈색이 퍼져가더니 온통 그렇게 되었다. 되돌릴 방법도 모르겠고 자신도 없어 갈색이 되어버린 율마는 보내주고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며칠 전 이웃분이 남겨진 율마를 보면서 물으셨다.

“하나는 아예 죽었나요?”

“네, 참 희한해요. 똑같이 햇빛 쪼이고 똑같이 물 줬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유 자식들도 그렇잖아요. 똑같이 먹이고 입혀도 다 다르잖아요. 지난주에 저희 집에 왔던 큰 딸은 성질을 버럭 내고 갔어요.”


말씀을 들어보니 기분도 좋고, 분위기도 좋았는데 식사자리에서 엄마가 던진 농담에 큰 딸이 숟가락을 탁 놓더니 그 길로 신랑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고는 밤에 짐 싸서 가 버렸다고 한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큰 딸도 본인도 마음이 괜찮지 않으시다고, 한 번도 아이들한테 화낸 적 없는 남편 분도 딸에게 마음 상하셔서 큰 소리 내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이 왜 나오는가 했는데 이번에 알았어요. 힘들여서 가르치고,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애썼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이웃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자라면서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상처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내가 엄마한테 품고 있는 마음들을 생각하니 그 딸의 마음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날 식사자리에서 엄마가 던진 농담이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늘 엄마는 나를 그렇게 대했고, 나는 늘 그게 상처였는데 엄마가 가볍게 또 그걸 건드리니 폭발했던 것 같다. 어쩌면, 예전에는 그저 그렇게 참아 넘기던 일이 이제는 남편과 아이가 있는 ‘피할 곳’이 있어 이전에 없던 반응이 나온 걸 지도 모르겠고.


다른 한편으로, 공들여 키운 자식이 엄마가 나를 못나게 키웠다며 나는 내 아이를 엄마처럼 키우지 않겠다 얘기하니 그 말을 들은 엄마의 마음은 또 얼마나 놀라고, 상처받았을까 싶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엄마 성격도 알 테고,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된 시집살이를 지켜본 딸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얼마나 분하고 서러우셨을까.




이웃모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와 엄마 그리고 나와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오늘만 해도 엄마와 그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말이 엄마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고 불편했는데, 엄마는 나이 들어가는 딸의 호된 잔소리를 들으며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또 잘난 척이야’ 했을 거다.


30년쯤 지나 나와 내 딸의 관계는 또 어떨까. 이웃분의 딸처럼 나도 내 딸이 나 같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수십 년 지나 딸과 얘기해봐야 할 것 같다. 아이들한테 가끔 이야기한다. 우리 나쁜 건 대물림하지 말자고.

우리 엄마는 내가 어쩌지 못 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잘 지키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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