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Hong Dec 14. 2023

영웅본색

나의 영웅

숨이 막혔다. 아침에 도시락 두 개를 챙겨 집을 나서, 밤 10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던 고3 시절.

나 때도 수험생은 고달팠다.

지옥 같다고 느낀 날들도 흐르긴 흘렀다. 그것도 빨리..

지난 12년간 공부한 것을 쏟아 부울 단 하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12월의 시험이 다가올수록 패배 의식은 커져갔다. 그쯤 되면 본인 실력 본인이 안다.

괜한 기대를 하는 부모님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허리도 안 좋은 엄마가 절에 가서 천배를 하고 오셨단다.

무슨 절을 천 번씩이나 하냐고 성질을 내는 아들.

지옥 같다고 생각한 날들이 진짜 지옥이 될 거라고 짐작했다.

재수? 삼수? 닥치고 군대?


고만고만하게 지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친구들이 주말에 공부를 하겠다며 독서실에 모였다.

모인 것부터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모이자마자 알게 됐다. 공부는 뒷전이고 라면집에서 수다가 한창이다. 수다로 지쳐 갈 때쯤, 규학이가 영화를 보러 가잔다. 망설이는 다른 3명.

최소한의 양심 같은 거였다. 여태 수다를 떨었는데 영화까지 보러 가?

탐탁지 않은 친구들의 얼굴을 보더니 규학이가 쐐기를 박는다.

"난 이미 봤는데 한 번 더 봐도 돼..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

솔직히 나였던 거 같다. "그래 보러 가자!"

소문으로 알고 있던 영화였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될 영화


그날 그렇게 또 한 편의 인생 영화를 만났다.

영웅본색


목숨을 건 우정. 지옥에 사는 사나이들의 이야기.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하고 싶었고 그들같이 살고 싶었다.

재수생으로 삶을 마치나 삼수생으로 생을 마치나

지옥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야간 학습을 끝마치고 터덜터덜 걷던 골목은 홍콩의 것과 다르지 않았고,

여자 친구가 없으니 친구들과의 의리와 우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화 속 그들도 그랬다(?)

다행히도 총을 살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담배는 살 수 있었다.

너무도 현실감 넘치는 영화였다. 영화 속 나락의 삶이나 그 당시 내 삶이 비슷했다.

희망이 없는 오늘이었다.

영어 제목은 A Better tomorrow.

내일은 그나마 나을까?


홍콩의 어느 식당. 뭐가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을 곳이었다.


영화를 끝마친 아들의 첫마디..

현실감이 전혀 없단다.

현실감 쩌는 영화를 보고 대뜸 한다는 소리보소!

뭐가 현실감이 없어? 친구와의 우정이?

범죄 조직이? 무능한 경찰이?

의외의 대답을 하는 아들 "아니 어떻게 총알이 무한정 나와? 탄창을 안 바꿔..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이런 검은 머리 미국인 같은 대답을 듣겠나..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을 쳐다보네.


탄창 바꾸는 게 그리 중요해?

윤발이 형이 목숨 걸고 친구에게 돌아오는데?

그래 탄창 잘 바꾸는 '존웍'은 참 현실감 있다.


그날 친구 넷은 같은 자리에서 영웅본색을 한 번 더 봤다. 어차피 지정석도 없고

서서 보는 사람마저 있는 삼류 극장이었다. 영화를 보고 며칠 후에는 주제가가 담긴 테이프를 샀다.

듣고 듣고 또 듣고.. 테이프가 꼬일 정도로 듣고..

광둥어를 받아 적어 외우고..

이 사실을 아들 대학 보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던 엄마가 아셨다면?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진다.


그날 영화를 보자고 했던 규학이는 사수를 했다. 그다음 이야기는 패스하련다.

규학이도 지금은 자식이 둘이나 있다.


영웅본색 (1986)

감독: 오우삼

출연: 주윤발, 적룡, 장국영

이전 03화 백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