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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Nov 14. 2023

백야

나 홀로 극장행

지금이야 대부분의 영화를 혼자 보지만 난생처음 홀로 극장을 간 날이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던 아침이었다.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다가 벼락을 맞았다.


아버지 손에 덮고 있던 이불은 날아가고 눈앞에 종잇장이 나부끼고 있었다.

잠결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힘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부끼는 종이를 보니 내 성적표였다.

부모 몰래 도장 찍어서 제출하려고 했던 성적표가 어떻게 아버지 손에?

그리고 왜 잠결 내 눈앞에서 휘날리고 있는 걸까?

생각도 찰나.. 아버지의 불호령이 귀를 때렸다. 언제 끝날지 모를 잔소리의 시작이다.

이럴 때는 도망이 최고다. 고개 숙인 채로 대충 대답하고 대충 죄인 얼굴을 연기하고..

도서관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섰다. 물론 도서관 갈 기분은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전화할 기분도 아니었다. 요새 말로 현타가 온 것이다.

그 후에 더한 성적표를 받게 되지만 그때까지는 최악의 성적표였다.

혼자 뭘 할까? 하다가 극장을 가기로 한다. 나 홀로 극장이라?

평소 같으면 상상조차 하지 않을 일이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었다.

극장 같은 어두운 곳에 혼자 있고 싶었다.

영화는 그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백야'로 정했다.


허리우드 극장으로 갔다.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근처 낙원상가 근처를 서성였다.

지금 기억나는 건 길게 늘어 선 리어카들과 식당의 큰 솥에서 팔팔 끓고 있던 뭔지 모를 것들.

고무신을 끓여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절이었다.


백야(White Nights): 밤에도 해가 떠있는 현상

테일러 헥포드 감독의 1985년 영화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그레고리 하인즈 주연의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미국으로 망명한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비행기 사고로 인해 소련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미국인 탭댄서를 만난다.

춤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두 남자는 소련에서 탈출을 계획하게 된다.

실제 발레리노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걸출한 탭댄서 그레고리 하인즈의 호흡이 좋았던 영화다.

특히 대역 없이 진행된 두 사람의 춤 장면은 꼭 찾아봐야 할 명장면이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이사벨라 롯셀리니의 사랑을 예상했던 건 빗나갔고,

그때는 흔치 않았던 흑백 커플의 사랑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예상했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실망했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처지를 잊을 순 있었다.

목숨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깟 성적쯤이야..


극장을 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지겨워 집 방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다음에 탭댄스 같은 걸 배워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던 거 같다.

두 정거장쯤 걸었을까? 배가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지만 갈 곳은 집 밖에 없었다.

이 놈의 고등학교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라는

생각이 머리 한 가득이었다.

그건 그렇고 성적표는 어떻게 아버지 손에 들어간 거야!?

동생이 고자질?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녀석이 그랬을 리는 절대 없다.

그럼 누구? 어떻게?


집에 들어간 건 어두컴컴 해진 후였다.

밥상 앞에 네 식구가 둘러앉았다.

나를 뺀 세 식구는 텔레비전에 한눈을 팔며 식사를 했다.

나는 묵묵히 빠르게 밥 먹는데 집중했다. 가능한 한 빨리 얼굴 마주하는 시간을 벗어날 참이었다.

배가 고팠었지만 밥은 한 공기로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밥상 앞에서 일어나자 아빠가 나를 올려 보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

"그런데 넌 성적표를 왜 내 주머니에 넣어 놨냐?

아침에 입으려고 보니 성적표가 주머니에서 나오던데.."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어제였다. 성적표에 부모님 몰래 도장 찍을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을 때였다.

동네 친구 현기가 불러 문 앞으로 나가게 됐는데,

그때 잠깐 걸치고 나갔던 아버지 재킷에 성적표를 남긴 거였다.


머리가 나쁘면 공범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운 하루다.

그리고 그날은 처음으로 혼자 극장을 간 날로 기억된다.


아들에게 미소 냉전시대의 이야기보다는

이 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줬다.

"범죄를 저지르려면 영리해지기부터 해라.. 아들아!"


White Nights (1985)

Director: Taylor Hackford

Cast: Mikhail Baryshnikov, Gregory H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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