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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y 03. 2024

그녀의 그림자 8

저녁나절

적막한 집안 공기를 깨트리는 물건들이 있다.

고개 숙인 칫솔. 녹 자국 남긴 면도 크림.

서로를 외면한 듯 서 있는 수저. 세월을 새긴 낡은 운동화….. 같은 것들.

메말라 바삭한 공기가 깨지며 나를 과거로 내몬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 그림자가 떠나버린 듯 한 허전함에 깜짝 놀란다.

그럴 때면 나는 멍하니 어머니 눈을 닮은 내 눈을 바라본다.

거울 속 나는 아직도 말없이 인내심을 발휘한다.


"그만 끝내자! 우리." 레스토랑의 고요함을 즐기고 있을 때, 그녀가 갑자기 한 말이었다.

맨해튼의 '뷰' 레스토랑이었다. 전망대의 바닥이 서서히 움직여 삼백 육십도 회전을 하는 곳이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왔다가는 다시 회전을 하는 곳. 나는 와인을 맛보듯 마신다.

그녀의 입은 미소를 지었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눈가의 처진 주름이 깊어 보인다.

마시던 와인에 대해 생각한다. 어디 와인이지? 몇 년도 산이지? 당도는? 신맛은?

당신 힘들었겠구나 속으로 외쳐본다. 그녀의 시선이 시작되는 곳에 내 시선을 얹는다.  

피해자 역할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실감 나게 배신당한 연기를 하고 싶었다.  

서툰 연기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

빈 잔에 와인을 따른다. 와인을 단 숨에 들이마시려다가 멈춘다.

와인은 그렇게 마시는 술이 아니다.


그동안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아무 짓도 안 했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했다.

그녀를 위해 운전을 했다.

택배로 점령당하는 나의 공간을 이해했다.

무거운 박스들을 옮겼다.

집 청소를 했다.

먹으라면 먹었다.

화난 그녀에게 화해를 청했고,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리고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나는 불만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로 그녀가 알까 봐.. 행여 그런 오해를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은 이제 그만 끝내 자!라는 그녀의 한마디에

바람 속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말수 적어진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간 적이 있었다.

"나 당신 때문에 죽고 싶었던 적이 있어.. 정확히 말하면 같이 죽고 싶었지..

비가 오던 날, 코스트코에서 적지 않은 물건들을 사서 나오는 길이었어. 당신은 나를 집에서 만나,

아웃렛으로 가는 길, 쇼핑을 시작하고 끝마칠 때까지 그리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까지..

말 한마디 없었어. 그날 나는 운전을 하는 동안 내내 핸들을 확 꺾어 중앙선을 넘어 그대로 마주 오는 차와 부딪쳐 버릴까를 생각했어. 그렇게 모든 걸 끝내고 싶었어.. 같이 죽어 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왜 안 그랬을까?"

나는 그녀가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건지 확실치 않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질문이었다고 해도 대답 같은 걸 할 수는 없었을 거다.


"아웃렛에서 산 물건들이 생각나더라고.. 그리고 그걸 기다리고 있을 한국의 손님들.. 두 인생을 지금

내 손으로 끝낼 수도 있는데 인터넷으로 떠들 손님들이 거슬리더라고.. 그래서 핸들을 안 꺾었어.."


비 오던 그날이 생생히 떠 올랐다. 쇼핑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유난히 차를 험악하게 몰았다.

실제로 몇 번 차도에서 미끄러지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배가 고파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내가 한마디 말도 안 꺼냈다는 그녀의 말이 좀 놀라웠다. 그건 늘 있는 일이었다.

길고 긴 쇼핑 리스트대로 물품을 사야 하는데 내가 입을 열면 방해만 될 뿐이었다.

내가 할 일은 짐꾼으로 언제나 한정되어 있었다.

길게 이어지던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 오던 그날 내가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멍하게 그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되뇌었다.

내가 한때 사랑하던 사람. 그 사랑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려 나 조차도 의아한 현실.

상상과 기억이 혼재되어 분간이 힘들었다.

그녀와의 시간들이 모두 꿈결 같이 느껴졌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나는 너의 눈빛이 싫어! 였다.

싫어하는 사람의 눈을 닮은 내 눈빛을 들킬까 봐,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뒷모습 그녀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어 보였다.

결코 잡히지 않을 그림자는 멀어져만 갔다.

어느 저녁나절 꿈처럼 혼자가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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