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살고 이는 화려하지 않은 삶들의 이야기
빈티지한 벽돌 그라피티 질감에 뉴트로한 글로우 컬러의 포스터에 그냥 끌려서, 한 시간 반이라는 부담 없는 러닝타임에 혹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터에서부터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배우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옴니버스 영화이기 때문인지 딱히 주인공이라고 누구를 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죠.
로스앤젤레스, 낮에는 화창한 햇살, 밤에는 반짝이는 조명으로 감겨있는 화려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화려함 속에서만 살고 있지는 않겠죠. 백인, 흑인, 라티노를 비롯하여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바다를 건너간 아시안 이민자까지, 말 그대로 멜팅 팟이라는 미국 사회를, 게다가 서부 대도시의 단면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비단 인종뿐만 아니라 이성애자, 동성애자 등 다양한 취향도 모두 담고 있죠.
백명의 사람이 있으면 적어도 백가지 이상의 다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각자의 삶 속에 각자의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도 각자 등장인물들이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툭툭 끊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발걸음과 시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생소한 관광지에 막 내렸다가, 며칠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 버스도 타고, 산책도 하면서 동네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살펴본 이야기 같은 느낌일까요. 1인칭 시점과 같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3인칭 시점으로 그 옆에서, 그 이야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않으면서 관찰하는 그런 느낌입니다.
미 서부 힙합의 바이브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내용을 떠나서 영화 자체를 즐길만한 요소가 많을 것 같습니다. 힙합 워너비들의 이야기가 나올 뿐만 아니라, 많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랩' 하듯이 쏟아내는 대사가 많기 때문이죠. 약간 힙합버전 뮤지컬 영화 같기도 하고요. L.A에 살려면 다들 랩을 잘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랩뿐만 아니라, 한 편의 시와 같은 독백도 정말 많습니다. 감독이 이런 쪽을 의도했던 것일까요. 음악 같은 영화이기도 하고, 문학 같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보는 내내 L.A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동부에 많은, 유럽식 각종 익스테리어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널찍한 주차장에 직사각형으로 툭툭 끊어져있는 황토색 건물들. 그리고 거기에 내려 꽂히는 화창한 햇살. 구름 없는 하늘. 획일화된 유행이라고는 볼 수 없는 형형색색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옷차림. 영어로 된 간판, 스페인어로 된 간판,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LA LA LAND가 화려하게 포장된 판타지 버전의 L.A를 그리고 있다면, 이 영화는 조금 보통 버전의 L.A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도 그곳을 몇 번, 며칠 구경만 하다 온 사람이니 실제 그 속 사정은 알 수 없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