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손미나의 소설 집필 과정
전에 손미나 씨의 여행 관련 책은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성공한 유명인사의 글인 만큼 다른 여행기들과는 다른 점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곳이지만 경험하는 수준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들도 달랐었죠. 항상 그 도시와 그 장소는 그대로 거기 머물러 있지만 누가 언제 누구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가슴속에 담고 떠나는 그곳에 대한 추억은 모두 다 다를 것입니다.
이번에 읽은 이 책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파리'에 대한 책입니다. 그냥 여행기가 아니고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다시 되돌아오는 시간을 담은 '생활 에세이' 정도 되겠네요. 전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에 살아보겠다고 해서, 프랑스어를 배워보겠다고 해서, 그곳에 살아보기로 해서 시작된 이야기였습니다. 그 테마에 맞게 처음 정착부터 이웃들과의 추억, 친구들을 만들어가는 과정들이 매우 재미있게 담겨있습니다.
아무래도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이 얇은 단행본 한 권에 녹아있다 보니 세세한 정보들이나 에피소드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큼지막한 느낌들 위주로 툭툭 놓여있는 느낌이랄까요. '파리'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담은 거창한 제목과는 사실 좀 다르게 '파리'에 대한 묘사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역시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여행이, 그리고 삶이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에서의 삶을 시작할 때 에펠탑이 보이는, 관광객이 즐비한, 시내 중심가 안전한 동네에 집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전 미국 유학 당시 잘 모르는 동네에 여행차 숙박을 할 때면 최저가로 검색을 하다 보니 치안이나 숙소 상태가 별로인 적이 종종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며칠 묶는 숙소도 아니고 살 집을 구하는 것이니 더 만만치 않겠죠. 우리로 치면 경복궁과 남산타워가 보이는 을지로 명동 롯데호텔 정도 동네이거나, 한강 건너 63 빌딩이 보이는 마포나 동부이촌동, 롯데타워 근처 잠실, 뭐 이 정도 동네이지 않을까요. 막상 유럽에 한번 나가 살아보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책 전반부에는 파리의 삶에 익숙해져 가고, 우리의 삶과 다른 부분을 느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파리에 대한 내용도 자주 나오고 말이죠. 중후반부로 갈수록 손미나 씨 본인께서 소설 집필이라는 큰 일을 시작하셔서 그런지,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는 제목과 무색하게, 여기가 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글과 씨름하는 모습이 주로 펼쳐집니다.
프랑스, 우리와 많이 다른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기도 했고, 혁명의 중심에 있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지금 그들의 삶은 과거 그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과 법과 정치와 역사에 관심이 많고, '무엇' 보다는 '왜'에 더 집중합니다. 결과보다 과정, 과정보다는 이유를 중시하는 사회. 그동안 막연하게 '프랑스는 그렇다더라'라고 알고만 있던 것들을 손미나 씨의 글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선택보다 우리 밖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 것도 많고, 내가 열심히 한다 해도 현실의 벽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당연히 존재해 오기도 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것이 속담이 될 정도로, 이유와 목적, 그리고 과정보다는 그냥 '결과'만 만들어내면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교육하고 선전하지만, 그 역사의 결과가 지금의 사회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것들도 많습니다.
무조건 우리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구의 절반이 서울과 수도권이라는 좁은 공간에 밀집해서 살아가면서, 고도의 경쟁을 피할 수 없고, 이로 인해 도시는 점점 더 고도화되고, 고도화된 도시에서의 삶은 소가족, 핵가족을 넘어 무자녀, 비혼, 1인 가정 아니면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서쪽에 있는 국가들보다 더 Westernized 되어있는 것이 우리나라이지 않을까요. 유럽, 영국에서 시작한 혁명이 서쪽으로 흘러 흘러 신대륙을 건너 계속 서쪽으로 건너와서 아시아 동쪽 끝자락에서 가장 융성하게 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이 책을 보는 내내 떠나지를 않습니다.
오지의 여행기를 읽으면서는 '별로 가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었는데, 예술과 인문, 철학이 가득한 오랜 도시의 생활기를 읽다 보니, 한번 제대로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그들이 쓴 글을 그들이 쓰는 글자로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스페인어 공부가 마무리되면, 중국어를 다시 시작해볼까 생각했었는데, 프랑스어를 먼저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중국에서는 배울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요.
32. 그러고 보니 낯선 이와의 교류는커녕, 지하철 같은 데서 절대 타인의 눈을 마주 보지 말라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36. 프랑스어를 다시 공부하는 거은 내 오랜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42. 루이 14세 시절,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던 오만방자한 귀족들이 자신들을 하층민과 차별화할 요량으로 말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단다.
50. 우리는 결혼을 사랑의 종착점 혹은 결과물로 생각하는 반면, 그들에게 사랑은 사랑일 뿐이고 결혼은 그저 선택 가능한 하나의 사회 제도에 불과하다.
67.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을 법적으로 따지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에, 혹여나 그런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러는지 좀처럼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72. 파리에서는 람보르기니나 메르세데스보다 오히려 낡은 자전거가 더 좋았다.
91. 알고 보니 무슈 피르맹은 원래 프랑스 내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러나 항상 작은 식당에서 와인을 파는 것이 꿈이었고, 일흔 살이 된 기념으로 의사일을 그만두고 비스트로를 열었다.
96. "저이는 너무나 큰 도시를 사랑하는 남자라 파리에서 오토바이를 몰며 살겠다는데 난 그게 싫으니 어쩜 좋아. (중략)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모르면 결혼 생활이란 불가능해. 결혼은 세 가지 삶이 공존해야만 성공할 수 있거든. (중략) 나의 삶, 그의 삶, 우리의 삶.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무너지면 그 결혼은 행복할 수 없어."
100. 우리나라 성형외과 대부분은 멀쩡한 얼굴을 뜯어고치라고 광고하는 일을 하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101. "자신만의 개성을 갖는다는 것, 뭔가 약간 결함이 있거나 나이 들어 주름이 져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보일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의술은 그런 일에 써먹는 게 아니라고!"
108. "그에 비해 프랑스 여성들은 자연스러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더 중요시한다고 봅니다. '아름다워 보이기'보다는 '진정으로 아름다워지기' 혹은 '자신에게 가장 맞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스스로 아름답게 느끼기'를 추구한다는 얘기죠."
115. "아가씨가 진짜 뭘 모르나 본데 원래 세상 모든 것은 지나칠 때 문제가 되는 법이지, 적당히 하면 뭐든 약이에요. 사랑이나 보약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오. 하지만 술이나 담배도 적당히 하면 괜찮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프랑스에 왔으니 프랑스식 삶이 어떤 건지 알았으면 좋겠다 이거요. 여기 앉아 있으면 아시아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어찌나 항상 급한지, 또 어찌나 일에만 목숨을 거는지 안쓰러울 지경이지. 인간의 행복은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 최고, 초고속, 최고급 그런 걸 좇다 보면 마음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면 몸도 병들어. 무엇이든 적당히, 천천히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이오."
116. 반면 프랑스 중산층의 조건은 이런 것이란다. 1. 자유롭게 구사하는 외국어 하나 2. 관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 3. 다룰 줄 아는 악기 한 가지 4.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 하나 5.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는 자세 6. 꾸준한 봉사활동
116. 각종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습량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 직장인들의 업무량 역시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 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1년에 100일 정도를 더 일하는 셈이 된다. 1년이라고 해봤자 고작 365일인데 그중 100일을 더 일한다는 것은, 유럽인들보다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을 일에 더 투자한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119. "영어 성적은 별로지만 수학에 뛰어난 아이가 있을 때 두 나라 엄마들의 교육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가지. 한국 엄마는 뒤떨어지는 과목인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거야. 프랑스 엄마는 아이에게 재능이 엿보이는 수학을 열심히 가르치는 거야. 어쩌면 당장 눈에 보이는 전체 석차는 한국 학생이 높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자기의 전문분야에서 빛나는 성과를 내는 사람은 프랑스 학생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153. 노트르담이 코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센 강기슭 뷔셰리 거리 37번지에 위치한 16세기 수도원 건물. 그곳이 바로 헤밍웨이의 파리 회고록, 그리고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한 영화 <비포 선셋>에 등장하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다.
173. 그러나 하필 그런 자리에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꼭 길고도 결론 없는 난상토론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199. 어떤 책들은 이미 전에 읽었던 것이고 어떤 책들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지만,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주옥같은 표현과 문장들이 마음을 사로잡는 명작이었다.
225. 유럽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로운 형태의 여행에 재미를 붙였는데, 호텔에 숙박하는 대신 주인이 직접 거래하는 집을 통째로 빌려 머무는 시스템이다.
239. "반대라니, 천만의 말씀! 부부, 부모 자식, 연인, 친구, 그 어떤 관계에서도 상태의 의지를 존중하는 게 가장 기본이야. 우리는 인생이라는 각자의 짧은 여행길에서 남보다 조금 더 특별한 인연으로 만나 곁에 있어주는 동반자일 뿐인걸.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 싶다는 일을 힘껏 지지해주지는 못할망정 반대를 해서 되겠어?"
248. 또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사랑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라는 카페 루이 필라프에서의 첫 밤이 가르쳐준 삶의 진실을 계속 떠올릴 수 있기에 전율했다.
253. 나중에 알았지만 실제로 창의적인 글쓰기를 위한 두뇌활동은 오전 시간이 가장 활발하다고 한다.
271. 파리에서는 집을 구해 정착하는 일도 복잡하지만, 떠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도 머리 아프다. 문제는 바로 편지였다. 무엇이든 편지로 자료를 남겨야 하는 증거의 나라 프랑스, 그 실체를 다시 한번 절감하며 거의 이를 가는 수준까지 학을 떼고 나서야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291. 아니, 무척이나 프로방스다웠다. 프랑스에는 샹브르 도트라는 일종의 B&B가 이는데, 주로 개인이 자기 집의 방을 개조해 손님을 받고 아침을 제공하는 장소다.
315. '꽃을 밟지 않고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다.' 5월의 봄레미모자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프랑스 남부 해안 코트다쥐르에 위치한 작은 마을 봄레미모자는 유럽 내에서 가장 꽃이 많이 피는 마을로 해마다 상을 받는 곳이다.
333. 되도록 밤에 글을 쓰지 않을 것,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한 시간 이상 걸을 것, 술이나 커피를 마시지 않을 것.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글 쓰는 일을 오래 하고 싶어서다.
336. 다만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만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글을 써서 송고할 수 있으니 작가에게는 큰 행운이라고 하겠다.
337. 거의 매일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브르타뉴의 작은 마을. 따뜻하게 덥힌 바닷물로 병을 치료하고 몸의 독소를 제거한다는 탈라소 테라피로 유명한 곳이어서, 어찌 보면 그 당시 나에게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장소였다. 하루 중 반은 거의 2년 가까이 쌓인 정신적, 육체적 노폐물을 빼내는 테라피를 받거나 뜨거운 해수가 출렁대는 수영장에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밀린 잠과 독서를 보충하고 영화를 봤다.
348.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르완스키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에도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인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빼돌린 것도 아니고 국민이 안위를 위험에 빠뜨린 것도 아닌데,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성적 욕구를 해소한 일을 가지고 왜 국민들을 향해 사과를 해야 하지?"
350. 프랑스에서 '다름'은 결코 '틀림'이 아니며,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으로 섣불리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353. 솔직히 우리는 제대로 토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무조건 틀렸다고 비난하다가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361. "그냥 즐겁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손님도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요."
362.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집을 발간하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잖아요."
380. 그들은 노동자들의 업무 현장의 문제점에 관한 주제로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본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니콜라의 말처럼 아르디송 씨는 정말로 샴페인을 마시면서 방송을 진행했다.
395. "마지노선이라고 생각되는 지점보다 목표를 높게 잡아야 실력이 느는 법이니까." (중략) 이상하게도 용기는 나이에 반비례한다. 어른이 되면 더 용감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아는 것이 많아져 겁이 늘어난다.
396. 눈이 묻은 스키 부츠를 신은 채로 모여든 젊은이들이 가득한 샤모니의 작은 술집에서 우리는 스키어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나 다름없다는 뱅쇼를 주문했다. (중략)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얼얼한 다리와 뻐근한 등의 통증이 사르르 사라지면서 몸이 따뜻해졌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오며 피로가 씻겨 나갔다.
405. "알프스가 겨울보다 여름에 더 아름답다는 것은 진짜 산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
416. 여행이란 원래 사람을 아주 가까워지게 하거나 완전히 멀어지게 만든다.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상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 감동하거나 실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