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색
걷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밥 먹고 부른 배를 꺼뜨리기 위해 걷거나,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지,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의미였던 적이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걷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책입니다. 라틴어로 그럴싸하게 적혀있는 것 때문에 외국 서적 번역본인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 작가의 글이더군요. 라틴어와 철학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무슨 의미로 이렇게 병기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90년대 가요 중간에 나오는 짤막한 영어 가사 같은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요.
철학적인 글쓰기가 다 그런 것인 줄은 모르겠지만 어렵지 않은 내용이 제법 복잡하게 쓰여있습니다. 문장 구조가 말이죠. 대학이나 대학원 당시 논문 작성 수업을 들을 때는 분명 이렇게 복잡한 표현들을 쓰지 말고 간결한 문장이 중요하다고 배웠었는데, 비단 이 책이 아니라고 해도 공부도 많이 하시고, 생각도 많이 하신 분들의 글은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중심 되는 내용은 단순해서 집중하기 좋았습니다. 걸어라, 걷기 위해 걸어라. 제법 마음에 남는 메시지가 많았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작은 근육들이 하나가 되어 순차적으로 움직이는 이 복잡한 운동을 해 나가면서,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천천히 차근차근 받아들이는 과정을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걷기가 만병 통치약은 아니지만, 분명 도움이 된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 어느 정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울증도, 불면증도, 식욕부진도, 고민도, 근심도, 걸으면 사실 어느 정도 해결되니까요. 물론 문제 자체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잠시 그 문제들을 잊을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굳이 '걷기'를 이렇게 진지하고, 무겁게 표현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여행으로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스페인까지 가서 굳이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사회는 마치 고속도로와 같이, 자동차나 고속열차와 같이 사람들을 앞으로 내몰고만 있습니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빨리 목표한 칼로리를 소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목표와 목적에만 몰두하다 보니 아무리 좋은 곳을 걷더라도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은 그런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덧 3월이 되고 낮에는 제법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지만 그래도 한번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면서 발바닥으로 내 체중을 느끼면서 걸어봐야겠습니다.
27. 반면, 걷기는 지금까지도 돈의 지배력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영역이다.
36. 사실,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자는 고속과 서두름의 강박에 시달린다. (중략) 철학자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가 지적했듯 "도로는 끊임없이 인간을 앞으로 몰아"대는 성질이 있으며, 동시에 도로는 "머뭇거리지 말고, 멈춰 서지도 말고, 계속 앞으로, 가능한 한 빨리 앞으로 나아가라고 강요한다."
59. 이런 길을 얼마간 올라가노라면, 마음이 절로 순해짐을 느끼곤 한다. 숨이 차오르면서 몸이 알아서 겸손함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고, 흙길은 칼처럼 날카롭고 사납고 차가운 느낌이 아니라 양털처럼 부드럽고 곱고 따뜻한 느낌으로 산책자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오르막길은 영혼을 승복시키는 선율이다.
63. 즉, 응시와 걸음에 관한 자신의 태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물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또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 우리의 집중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다.
66. 느림의 걷기는 되돌려놓는다. 판타지를 현실로 되돌려놓는다. 동시에 그 걷기는 되돌려 놓는다. 정신 사나움을 조용함으로, 번다함을 한가함으로, 오만함을 겸손함으로, 성마름을 느긋함으로, 공포감을 태연함으로, 불안감을 차분함으로. 이것은 회복이되, 동시에 전복이다. 느림의 걷기로 보행자는 뒤바뀐다. 사물을 객체나 도구로 응시하던 태도는 사물을 주체나 목적으로 대하는 태도로, 지구에 대한 무관심은 자기 가까이에서 존재하고 있던 지구에 대한 자각으로, 편리함만을 추구하던 태도는 어려움에 기꺼이 응전하는 태도로, 맹목적으로 흘러가던 삶의 자동운동은 목적성 있는 삶이 무엇인지에 관한 멈춤의 사색으로 뒤바뀐다.
69. 스마트폰이 없으면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이런 질병의 원인은 무엇일까? 스마트폰 중독의 한 면모는 분명 새로운 것(novelty) 중독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새로운 것은 얼마나 힘이 세던가.
77. 간단함이야 말로 걷기의 결정적 성격이다. 걷기의 정수는 실존의 단순화 또는 실존의 미니멀리즘이기 때문이다.
82. 하지만 조지 버로가 자신의 우울증을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선택한 활동은 바로 걷기였다. 그는 영국을 걸었고,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그리고 모로코까지 걸었는데, 그에게 걷기는 "자신의 슬픔을 넘어서는 수단"이었다.
100. "내가 혼자 두 발로 걸었을 때만큼 깊이 생각하고, 깊이 존재하고, 깊이 살고, 깊이 나 자신이었던 적은 없었다"는 장-자크 루소의 고백은 진실된 것이다.
108. 이런 뜻에서, 걷기는 기적의 시간이다. 자기 목적적인 시간은 걷기로 가장 쉽게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는 철학자 볼노가 간명히 정리한 것처럼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도보여행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목적적인 시간이 도보여행으로 체험되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여행자는 홀로 길 위에 올라야 한다. 둘째, 시간과 경로를 엄밀히 정하지 말고, 임의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즉, 느슨하게 여정을 계획하고, 계획의 변경을 우연에 맡긴다는 견고한 원칙을 지녀야 한다. 셋째, 걷기 시작하기 이전의 삶을 통히 망각하고 오직 도보여행 또는 걷기 그 자체에만 전념해야 한다.
127. 노동하다시피 산책을 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산책 Walking에서 자신은 하루 4시간 정도는 꼭 사냐를 걸어야 건강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썼다.
170. 이렇게 마주치는 사물들의 본래적인 가치와 의의를 일깨우는 보행의 효험을 환기하며 르 브르통은 "걷기는 우리의 습관적인 일상이 잊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가치의 단계를 바로잡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걷는 만큼 잊고 있던 세계가 우리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어도 좋으리라. 질주의 병이 완보로 치유되는 이 현상은 누구나 한 번은 해 봤을 미각 체험만 상기해도 쉽사리 이해된다. (중략) 보행은 평상시 간과하던 사물들의 활력적인 디테일을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 줄 뿐 아니라, 평상시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 더 이상은 하찮지 않음을 알도록 우리의 감각에 존재론적, 미적 개안을 선사한다.
175.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혹자는 천천히 걷는 것이 어디 아무한테나 허락된 사치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것은 등 따시고 배부른 한량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의 고상한 취미일 뿐 당장의 생계가 빠듯한 서민의 관심사는 아니라며 말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경제 활동이 아닌 모든 활동은 비생산적 무위에 불과한가? 돈 버는 시간이나 재충전 시간이 아니면 모두 다 허비되는 시간인가? '일없이' 걷는 '일'의 무위는 정말로 비생산적인가?
181. 이런 날들이야 말로 무위가 가장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근면이었다. 나는 이러세 하루의 가장 값진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많은 오전 나날에 몰래 빠져나오곤 했다. 왜냐하면 금전상으로는 부자가 아닐지라도 나는 양지바른 시간과 여름날은 얼마든지 가진 부자였기에 이것들을 마음껏 소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요, 그 시간을 좀 더 작업장이나 학교 교단에서 보내지 않았다 해서 후회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