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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n 12. 2021

나는 왜 그에게 휘둘리는가

Échapper aux manipulateurs

 제목에서 느낄 수 있을 만큼이나 아주 강한 어조로 한자씩 눌러 적어 내려간 책입니다. 불어 원서의 제목은 <Échapper aux manipulateurs>, 영어로 하면 <Escape the manipulators>, '조종자로부터의 탈출'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번역서의 제목은 조금은 순화된 어조로 '나는 왜 그에게 휘둘리는가'로 표현되었습니다. 책 전반에 걸쳐 '심리 조종자', Manipulator라는 단어가 셀 수 없이 등장합니다. 제목에서 '그'로 이야기한 이 책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대상이죠. 직장에서, 가정에서, 연인관계에서, 이 책에서는 어디서든 당신의 심리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조종받고 있다는 느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받지 못하게끔 철두철미하게 말이죠.


 프랑스에서 작성된 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글들보다 직설적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공격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칼로레아로 갈고닦아진 철학적 소양 때문일까요.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으면, 에둘러 가지 않고 정곡을 바로 찌릅니다.


 사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사회생활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을 때, 후배보다는 선배가 더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러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안 읽었던 책'으로 여기고 무심코 꺼내어 보기 시작했겠죠. 이 책은 상대방의 심리를 조종하는 사람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그렇게 기억나는 부분 없이 읽었던 까닭은 아마 주변에 저를 조종하려는 분들이 없었기도 했고, 저 스스로도 제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비치지 않을까라는 고민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래 발췌한 글귀가 많다는 것은 아마도 제가 이 책을 조금은 더 관심 기울여 봤다는 것이겠죠. 올해 읽은 이 책에서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감정적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유 없는 불안과 피로는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동시에 또 다른 고민을 하면서 책장을 넘겨 나갔습니다. '혹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도 있는 행동들이 남들을 조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은 초반부터 심리 조종자에 대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심리 조종자에 대한 '흉'을 늘어놓다가, 끝에 가서 나름 신선한 결론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이러한 관계는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반대편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제가 심리 조종의 피해자라면 나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조종하고 있다면, 그 상대방에 의해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를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갑질, 가스 라이팅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2021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이나 그렇죠. 책을 처음에 읽어 나갈 때는 저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분들이 떠올랐는데, 점점 더 읽을수록 제가 불편함을 주었을지 모르는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텔 프티콜랭은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심리치료사라고 합니다. 치료의 목적에서 이 글을 적으셨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초반에 강한 문체로 독자의 머릿속을 일단 한방 맞은 것처럼 부셔놓고, 조금씩 문제의 본질을 찾아볼 여유를 주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조용조용하게 설명했으면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책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말을 통해 같이 읽었던 <59초>라는 제목의 심리학 서적에서 이러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삼기보다는 두 사람 다 싫어하는 것을 주제로 삼는 게 좋다. '부정적인 것을 통한 개인 간의 공감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의 공유를 통한 유대'라는 논문에서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에 의견이 일치할 때 더 친밀감을 느낀다고 지적했다."(p152) 이런 까닭이었을까요. 일단 심리 조종자에 대한 공격적인 '험담'으로 시작된 글은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다양한 방면의 책을 깊이 없이 읽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독서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복잡한 현실에서 잠시 도피해 볼 수 있는 소중한 회복의 시간이라는 점은 지금 처한 제 현실에 아주 좋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관점을 살필 수 있는 덤도 있죠. 이 책에서는 '심리 조종자가 나쁜 것이 분명 맞다. 하지만 네가 그 상황을 만들었다. 너는 혹여라도 타인을 조종하려 하지 말고, 네가 조종당하고 있는 상황이 있다면, 네가 만든 그 관계에 책임을 지고 청산해라. 그것이 네가 자유로와지는 길이다'는 결론을 내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바로 읽었던 경제서적 <아빠의 첫 돈 공부>에서는 투자 등을 통한 구축한 경제적 자립여건을 바탕으로 내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쓰는 '자유'를 논했다면, 이 <나는 왜 그에게 휘둘리는가>에서는 내 감정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이든 경제학이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사람의 생을 이야기할 때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날씨가 제법 더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한여름은 아닌 6 초의 주말.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게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읽기 좋은 날씨입니다.




25.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수밖에 없다.


28. 마찬가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수시로 "쓸모없는 녀석!"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리 탄탄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38. 심리 조종자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일관성이 없고 모호하고 모순적인 데다가 예측할 수가 없다.


40. 잘된 일은 모두 주인님 덕분이다. (중략) 잘못된 일만 죄다 피지배자가 덮어쓴다.


44. 심리 조종자는 희생양으로 삼은 이가 자신의 소신이나 발언을 철저하게 의심하고 자신이 고유한 기준을 잃어버리게 조장한다.


58. 남이 말하는데 딴 데를 보거나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딴짓을 하거나. 그러다가 빈정대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입을 삐죽 내밀고, 멸시하거나 언짢아하는 표정을 짓고, 하늘을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하고, 탄식하듯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멍한 표정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죽일 듯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본다. 상대는 이유도 모른 채 점점 더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64. 심리 조종자는 험담하기를 좋아하며, 남의 곤경을 이러쿵저러쿵 신나게 떠들고 다닌다.


68. '날 실망시키지 마!'라는 짧은 말 한마디에도 이러한 메커니즘이 내재해 있다.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알아서 메시지를 해독하라는 셈이다.


74. 자기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거니와 당신이 함정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80. 심리 조종자는 자신은 게으르고 잔머리를 굴릴지언정 남들이 일을 쉽게 처리하는 꼴은 못 봐준다.


84. 입장을 바꾸어 누군가가 당신을 위협하거나 불안하게 한다면 결코 좌시하지 마라.


96. 따라서 지배 관계에서는 어떤 안정감도, 어떤 친밀감도 불가능하다.


97. 그리고 수동적이지만 공격적인 아랫사람에 의해 윗사람이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략) 어느 날 갑자기 보복성 병가를 내거나, 지각을 밥 먹듯 하거나, 업무를 게을리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누가 정신적 괴롭힘의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헷갈린다.


106.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더라도 그의 몸은 벌써 알고 있기에 힘들다고 울부짖는 것이다.


109. 두려움을 떨치려면, 타인의 보호와 신뢰도 얻어야 한다.


124. 심리 조종자는 상대를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만 정감 가게 군다. 당신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완전히 무시할 것이다.


126. 그는 자기가 조종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 한다.


128. 정말로 교양 있는 사람은 소탈하고 너그럽다. 심리 조종자는 잘난 체하는 말투로 다른 사람들의 무지를 조롱하며, 남들이 바보 취급당하는 꼴을 보고 좋아한다.


139. 심리 조종자는 감상과 정서를 우습게 여긴다.


156. 그들은 감정을 말로 규명하지 못하며 그저 피해야 하는 거북한 것으로만 여긴다.


168. 그에게 심리 조종은 '위험하고 악의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환경을 통제하려는 시도'이다.


175.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단념하는 것, 이것이 '놓아주기'다. (중략)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온전히 책임지기로 한 사람은 세상 모두를 만족시키려 하지 않으며, 놓아야 할 것은 명철한 의식 상태에서도 놓을 줄 한다. (중략) 그렇게 참으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려면 자기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욕구를 존중해야만 한다.


185. 기장은 그녀의 칭찬을 듣고 눈에 띄게 언짢은 표정으로 오늘 비행기 착륙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는 말을 던지고 가 버렸다. 기장이 부조종사를 괴롭히기 시작한 그 시기가 맞았다. 어쨌든 이유를 알고 나니 부조종사는 마음이 한결 편했다.


187. 사람들은 비겁함 혹은 편의에 따라 가장 강한 자에게 붙고 가장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척 시치미를 떼는 경향이 있다.


194. 심리 조종을 당하는 사람들에겐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고 마냥 호의적이다.


205. 욕을 먹거나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이제 이웃 남자의 일거수일투족과 기분을 살피는 일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어야 했다.


223. '언젠가 자기도 알겠지'라는 기대는 무서운 함정이다. 심리 조종자는 자기 해동과 과오를 철저하게 부인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또 자기는 완벽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남들에게서 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32. 게다가 지배 관계에서 벗어나려면 때로는 상당한 돈을 포기해야 한다. 받아 낼 것으로 기대했던 돈, 투자한 돈, 써 버린 돈, 잘 나가는 기분, 성공의 겉모습 등 그동안 지옥에 살면서 한 줄기 위안으로 삼았던 바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지옥이 사라지면 위안도 필요 없다. 그러니 그 겉모습은 놓아 버려도 괜찮다.


233. "결국 내가 포기한 그 돈이 내가 찾은 자유의 대가였어요."


236. 하지만 사탕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사탕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46. 하지만 아무리 딱한 이유가 있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있는 법이다. 이해가 곧 용서나 허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256.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 두려움이다.


269. 상대가 대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휘어잡으려는 생각밖에 없다면, 우리에게는 그 사람과의 소통 자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277. 폭력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중략) 도발하는 쪽에 절반의 책임이 있다면 도발에 반응하는 쪽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 모든 성인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고 자신의 심신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성인으로서 이러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세가 다른 사람의 파괴적인 습성을 자극하여 상호 폭력을 유발하거나 유지시킬 수도 있다.


280. 상대가 적게 알 수록 당신에게 피해 입힐 일도 줄어든다.


282. '안돼요'는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을 때 가장 빛난다.


283. 나에 대한 존중은 남에게 부탁해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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