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고 말하면 더 피곤하게 위로할까 봐 걱정될 때 볼만한 글
위트와 유머,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짤막한 웹 콘텐츠가 책을 발간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루 몇 글자 재미있게 읽으면서 잠시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을 통해 힐링되는 기분을 받는 것과, 그것을 책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보는 것은 조금 다른 경험이기는 합니다. 한두 컷짜리 삽화나 두세 줄짜리 글귀가 한 페이지라는 공간을 휑하게 채우고 있는 모습에서 무언가 낭비가 느껴지는 것은 제가 마흔 줄에 접어든 꼰대 아저씨이기 때문이겠죠.
세상의 모든 것이 사실 효율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글의 성격에 따라 한정된 지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읽는 이 가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그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을 필요도 있고, 글자보다 넓은 여백을 보면서 그냥 잠시 편한 마음을 갖게 하거나, 잠시 생각에 빠지게 만들 필요도 있죠. 기름에 물감을 풀어 몇 겹씩 덧칠해가면서 정물을 빽빽이 황금비율로 배치한 유화가 어울리는 벽이 있다면, 여백이 시원한 소박한 펜화나 수묵화가 어울리는 벽도 있으니까요.
우리 대다수는 사실 경험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면 경험의 깊이 면에서 시간적인 경험이 한정되어 있을 것이고, 나이가 많더라도 한 분야에만 오래 몰두하였다면 경험의 폭 면에서 젊은이들보다 더 시야가 한정되어 있을 수도 있죠. 사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한다면 세대 간, 계층 간의 갈등은 많이 사그라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일단 그렇습니다. 꾸준한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이는 한 젊은이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를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냥 보통사람의 보통 시선인 것이죠. 그렇기에 이분의 웹 콘텐츠가 공감을 얻고 이렇게 발간까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렇다 보니 이 책이 무언가 남는 것이 있다거나 배울 점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대로 모든 책이 다 양서일 필요는 없겠죠. TV를 틀어 뉴스나 다큐멘터리 등 정보만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나 예능도 보면서 기분도 전환할 필요가 있듯이, 이 책은 적당한 공감과 적당한 휴식, 적당한 시간의 소비, 이런 것에 초점을 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GRIT:IQ, 재능을 뛰어넘는 열정적 끈기의 힘'과는 매우 대조적인 책입니다. 물론 꾸준한 연구를 통해 논문으로 발표되는 내용을 단행본으로 엮은 연구서적과 이 책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두 종류의 책 모두 다 서점 한편에는 쌓여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책에서 좀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냥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고, 하루하루 정신승리에 취하고, 스스로에게만 관대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일부 미간을 찌푸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틀린'것은 아니고 '다른' 것일 뿐이지만, 솔직히 저런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나는 피해자, 부장님은 가해자, 회사가 이상한 곳' 프레임이 이 책의 한계인 것 같아 다소 아쉽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그 반대편에서의 입장도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괜찮은 주말 힐링 + 킬링 타임이었습니다. 무려 250페이지를 훌쩍 넘는 두께의 책이었지만, 내용보다 여유 있게 구성된 여백 덕분에 30~40분 내외, 만화책 읽는 느낌으로 가볍게 훑어볼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도 10~20년 전에는 저런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그 기분을 잠시 되새겨보고, 그리고 지금 같이 지내는 어린 친구들의 마음에 혹시 이런 부분이 있지 않을까 떠올려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25. 지금까지 나는 내 동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을까?
28. 엮인 굴비 중의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45. 예전에 나는 세게 보이려고 회사에서 누가 성희롱 수준 음담패설을 해도 괜찮은 척 넘어갔고 내가 먹지 않는 개고기 회식에도 따라가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강하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거부할 줄 아는 것이었다.
47. 해야 할 일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나에게 맞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 이유 만으로 나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53. 그즈음 내가 우울에 깊이 빠지지 않고 제어할 수 있던 것은, 우울해하다가도 다음 날 출근하기 위해 일단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66. '이 일은 생각할 게 많으니 머리가 맑을 때 하자'는 생각으로 미루고 있는 일이 있다. 그런데 머리가 맑아지는 순간이 오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다.
70. 졸리진 않은데 일을 하긴 싫다. 이 상태로 몇 시간을 보내면 졸리지만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지.
71. 가장 무서운 지옥은 견딜만한 지옥일 것이다.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할 테니까.
73. "시간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지금 바로 해라."
85. '집에서 입지 뭐'하고 버리지 않는 옷들도 너무 많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는 집에서도 영원히 입지 않는다. '이건 평소에 입기엔 좀 그렇지만 특별한 날엔 입을 수 있을 테니까'라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는 옷들도 있다. 물론 특별한 날이 몇 년째 생기지 않고 있다.
126. "누나, 살면서 뭔가 충분히 가져본 적 있어? 우리, 살은 충분히 가질 수 있어."
127. 봄, 두꺼운 겨울옷은 벗어던지고, 살랑살랑 봄 옷을 꺼내 입으면, 안 맞아.
147. 오늘따라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면 평소에도 그랬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하세요.
156. 처음에 다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프리랜서 때와 달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직장 생활의 고달픔이 하나하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이래서 예전에 직장 다니는 걸 힘들어했지'라고 새삼스레 깨닫는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프리랜서 생활이 좋기만 했던가 하면 당연히 아니다. 거기엔 다른 종류의 고달픔이 있지. 그리하여 생각했다. 인생은 어째서 '고단하거나/고단하지 않거나'가 아니라 '이쪽으로 고단한가/저쪽으로 고단한가'인가?
175. <TV 동물농장> 재방송을 무심코 보는데, 하이에나들이 돼지 살점 하나 얻으려고 일인자에게 아양을 떠는 광경이 나았다. 삶이여.
196.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주로 걷는다. (중략) 그렇게 그날 스트레스로 괴로워할 체력을 다 써버리는 것이다.
202. 파전 비밀 결사대가 있으면 좋겠다. 비 오는 밤 약속한 비밀 장소에 모여 파전을 부쳐서 아주 비밀스럽게 먹는. 서로의 신상은 묻지도 않고 말없이 파전만 묵묵히 먹은 후에 고개만 한 번 끄덕, 하고 헤어지는. 하지만 오래갈 리가 없어. 그 와중에도 어떻게 눈이 맞아 연애하다 깨지는 커플이 생기기 시작하고 대원들에게 온수매트를 팔아보려는 자가 나타나고 현장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는 자가 생기면서 끝나겠지.
209.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을 써버리고 있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 나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일을 하면서 다시 안 올 오늘을 보내고 있다. 돈을 많이 벌면 내 남은 인생을 모두 사서 내가 가질 수 있겠지.
220.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사연이 많은 친구가 귀하다.
236. 터키 아이스크림은 쫀득한 식감 때문에 먹고 싶다가도 건네줄 때 아이스크림 콘을 줄 듯 말 듯 이리저리 휘두르는 그 특유의 장난 때문에 망설여져 관두고는 했다. (중략) 비치된 깃발 중 하나를 들면 장난 없이 아이스크림만 받겠다는 의사 표현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238. 좋은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좋은 노래는 또 얼마나 많을까. 그 좋은 노래 다 못 듣고 가는 게 인생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코가 시큰해진다. 인생이라는 고단한 여정 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기어이 아름다운 것들을 남기고 죽는다. 아름다운 것을 찾고 보고 들어야 한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239. "좋은 사람들과 웃으면서 사진 많이 찍고 지내시길 바라요."
253. 가끔은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예전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언제부터 '사람들이 하는 행동의 이유를 전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쟤는 그런가 보다'하면 되는 관계인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반드시 이해하든지, 이해되는 사람으로 만들든지 하겠다'라며 나섰다가 엉망진창이 되는 광경을 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꼭 완전히 이해해야 할 의무도, 이해시켜야 할 의무도 없다. 그냥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쟤는 그런 사람인가 보구나' 하며.
267.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늘 나를 비웃고 있습니다.